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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식성] 지옥의 전쟁, 반성의 기록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물론 전쟁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조짐도 없이 뽷 하고 터질 리 만무하므로, 조선의 몇 안 되는(이라고 미루어 짐작해본다) 참된 관리들은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조선 정부의 쇠퇴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는 점이 비극이라면 비극이겠다. 피할 길 없는 전쟁은 터졌고, 조선은 잘못된 정보와 함께 제대로 된 정보(도 가지고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은 정보라고 해야 할 것 같다)가 뒤섞인 채 연전연패를 거듭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말이 의미가 없는 이유는, 설령 제대로 된 정보만 갖고 있었고, 그래서 그 정보만을 믿었다 하더라도 조선은 패배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막고자 하는 의지는 있었지만,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더보기
[201904 / 식성] 모르면 약이다 by 란테곰. 맛이 안 난다, 뭔가 부족하다. 그럴 땐 이거 조금만 넣어주면 맛이 확 산다. 미ㅇ, 다시ㅇ, 연ㅇ 등으로 대표되는 조미료 얘기다. 부모님이 차려주신 밥상만 받아먹던 내가 갑자기 요리를 시작하게 되었을 무렵, 조미료는 내 부족한 능력을 메꿔주는 훌륭한 친구이자 버팀목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해도 맛이 나오니까. 진하고 자극적인 맛을 한참 찾을 무렵엔 달걀과 조미료만으로 볶음밥을 해 먹었을 정도 - 그걸 먹어본 지인 중 한 명은 이건 먹는 게 아니라고 표현했다 - 였다. 그렇게 처음 요리를 하게 된 지 십수 년이 지나서, 동생과 내가 따로 나와 살게 될 무렵 우리 집에서 조미료가 사라졌다. 다 똑같은 맛, 뭔가 느끼한 맛이 느껴진다는 것에 공감한 것도 이유였고, 조미료가 없이 며칠 요리를 해보니 없어도 그럭.. 더보기
[201903 / Again] 열흘짜리 악몽 by 란테곰. 잘 시간이 되었다. 방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고, 안경을 벗어 옆에 놓은 후 눈을 감았다. 설핏 잠이 들 무렵, 미간에 차가운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란 나는 벌떡 일어나 눈을 뜨고 안경을 낀 후 방 불을 켰다. 천장은 멀쩡했고 내 이마 어디에도 물이 닿은 흔적은 없었다. 것참 희한한 꿈이구나라고 중얼거리곤 다시 방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고, 안경을 벗어 옆에 놓은 후 눈을 감았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막 잠들 무렵 미간에 물방울을 맞는 느낌에 잠을 설쳤다. 더군다나 물방울은 처음보다 다음날, 그 다음날이 되어가며 점점 굵어져 나흘째엔 한여름 태풍때 내리는 비를 맞는 기분이 들었고 닷새째 되던 날엔 마치 우박을 맞는 기분이었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더보기
[201903 / Again] 또 다시 오늘 by 에일레스 그의 이름은 필 코너스. 피츠버그 지역 방송사의 기상 예보관이다. 시니컬하고 매사에 불만 많은 그는 PD 리타, 카메라맨 래리와 함께 성촉절(Groundhog day) 취재를 위해 펑츄토니 마을로 가게 된다. 성촉절은 '펑츄토니 필'이라고 불리는 마못(다람쥐과의 동물)을 이용해 봄이 언제 시작될지 점치는 전통 축제다. 필은 성촉절도 펑츄토니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빨리 펑츄토니 마을을 떠날 생각만 한다. 그러나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갑작스러운 폭설 때문에 필은 펑츄토니 마을에 발이 묶인다. 그렇게 다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는데, 뭔가 이상하다. 라디오에서는 전날과 동일한 노래와 멘트가 흘러나오고, 전날 만났던 사람들이 또 똑같이 그에게 말을 걸어온다. 또 다시 2월 2일, 성촉절이라는 것이다! ※.. 더보기
[201902 / 비율] 10% by 란테곰 절대 다수가 아닌 소수에 속한 삶을 사는 것은, 절대 다수가 소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불편하게 여길 경우 소수는 자신을 감추거나 절대 다수인 척 위장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소 예민할 수 있는 이슈인 LGBT나 정치 얘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있는 왼손잡이에 대한 시선은 꽤나 좋은 예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왼손잡이라는 이유로 성장기 시절 겪었던 비슷한 경험들이 있다. 한글을 배울 적 왼손으로 연필을 잡을 때마다 혼나던 일이나 명절마다 찾아갔던 큰집에서의 불편한 식사 - 젓가락질 오른손으로 하지 않으면 세뱃돈을 주지 않겠다는 협박(?)을 듣고 있노라면 그 맛있는 동그랑땡에도 손이 가지 않았다. - , 세상 답답한 가위질 등등. 결국 등쌀과 압박을 못이.. 더보기
[201902 / 비율] Highlight the remarkable by 에일레스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이 모든 분야에서 대립하던 냉전 시대에 가장 큰 화제 중 하나는 바로 우주 개발 분야였다. 소련은 미국에 앞서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한데 이어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를 태운 위성을 쏘아보내는데 성공했고, 최초의 우주인인 유리 가가린이 지구 궤도를 도는데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미국 나사(NASA)는 비상이 걸리고, 우주 진출 프로그램인 '머큐리 7'에 사활을 걸게 된다. 거기에, 그녀들이 있었다.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6) 관람객 9.36 (1,065) 기자·평론가 6.75 (8) 개요 드라마 2017.03.23. 개봉 127분 미국 12세 관람가 감독 데오도르 멜피 영화 는 나사에서 근무하여 우주 개발 프로젝트에 크게 기여한 세 여성의 이야기를 .. 더보기
[201902 / 비율] 50% 의 비극 by 김교주 특별히 경제나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라는 제목 정도는 들어봤을 것 같다. 세기의 베스트셀러이자 지금도 심심치 않게 관련 분야에서 회자되는 책이니까. 장 지글러가 이 책을 쓴 지 이미 20년이 지났고, 제목에서 말하는 50%는 정확한 비율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수치에 가깝다. 세계는 변했고, 기아와 빈곤으로 죽어가는 이들의 숫자도 달라졌다. 그러나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그 변화가 점점 더 가난한 이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의 상황을 보여주는 수많은 비디오들이 실제보다 과장된 포르노에 가깝다는 비판이 있는 반면, 신자유주의와 돈의 논리에 의해 피할 수 있는 굶주림을 피하지 못해 죽어가는 이들의 현재를 그 어디에서도 정확히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성찰도 존재한.. 더보기
[201901 / 덕후] 팬 by 에일레스 오타쿠-라는 단어를 들은 것은 사실 꽤 오래된 일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전격 개방되고 난 2000년대 초반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등에 심취한 사람을 흔히 일컫던 이 단어는 점차 한국화(?)되고 대중화(!)되면서 오덕, 덕후, 덕-등의 변형을 거쳤고 현재에 와서는 특정 분야나 대상에 몰두한 사람들 두루 칭하는 말이 되었다. 요즘에 와서는 '열성팬'이라는 단어의 조금 심화 버전(?)같이 사용되는 것 같다. 나는 한가지를 깊게 파기 보다는 여러가지를 얕게 파는 스타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품목들(?)이 간혹 덕후라 불리는 사람들의 기호 아이템인 경우가 있어서 일부 지인들에게서 덕후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덕후라기엔 난 너무 라이트하지.. -ㅅ- 오늘 소개.. 더보기
[201901 / 덕후] 소년이여 성덕이 되어라. by 란테곰 내가 학교 이외의 공간에서 처음 친해졌던 사람은 게임을 즐기기 위해 일본어를 배운 사람이었다. 당시엔 흔한(?) 케이스였다. 공략집을 구하는 것도 어려웠거니와 검색은 꿈도 못 꿀 때였기에, 일본어로 된 RPG 게임을 즐기려면 (공략집을 돈 내고 구입하거나) 일본어를 배우는 방법뿐이었다. 그렇게 게임을 통해 자연스레 일본어와 문화에 익숙해진 다음 애니나 노래 등을 찾게 되면서 좋아하는 범위가 확장되는 방식이었다. 당시 한일문화교류가 전부터 조금씩 이뤄졌으나 3차 – 게임기용 게임과 국제 영화제 수상작 외 애니메이션은 불가 – 시절이었기 때문에, 좋게 보면 선구자지만 나쁘게 보면 ‘불법 외국 문화 교류 집단’ 이기도 했다. 저작권에 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땐 소리바다가 전국민적으로 유행했을 때였으니 .. 더보기
[201812 / 눈] 첫눈빵배 첫눈빵 by 란테곰. 헉헉헉. 평소엔 바라보기만 했던 동네의 오르막길을 끝까지 뛰어오른 나는 전봇대에 기대 숨을 고르고 있었다. 터질 것 같은 허벅지를 손으로 두드리면서도 연신 좌우로 고개를 돌려 쫓아오는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앞으로 15분만 더 도망가면 된다. 딱 15분만. ’첫눈빵배 첫눈빵‘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때는 그저 단순한 놀이로 생각한 것이었다. 고려 시절 첫눈을 선물해주면 첫눈을 받은 사람은 술이든 밥이든 이른바 ’첫눈빵‘을 샀다는 풍습에 더해 그 상품을 대전 유명한 빵집의 첫눈빵으로 끼얹어본 것이었다. 우리 동네는 첫눈이 늦어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지만 이미 진행한 많은 동네들에선 첫눈이 묻은 편지를 상대편 집으로 보낸 '퀵빵'은 물론이요 새벽에 상대편 집 마당에 편지를 놓아두고 밤새 기다렸다가 다음 날 아침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