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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01904/식성] 지옥의 전쟁, 반성의 기록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물론 전쟁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조짐도 없이 뽷 하고 터질 리 만무하므로, 조선의 몇 안 되는(이라고 미루어 짐작해본다) 참된 관리들은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조선 정부의 쇠퇴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는 점이 비극이라면 비극이겠다.

피할 길 없는 전쟁은 터졌고, 조선은 잘못된 정보와 함께 제대로 된 정보(도 가지고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은 정보라고 해야 할 것 같다)가 뒤섞인 채 연전연패를 거듭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말이 의미가 없는 이유는, 설령 제대로 된 정보만 갖고 있었고, 그래서 그 정보만을 믿었다 하더라도 조선은 패배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막고자 하는 의지는 있었지만,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조선은 갖지 못했다. 비단 선조의 실정 탓이 아니더라도 조선이라는 국가의 체제가 그랬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 한켠에 서애가 있었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성리학을 배웠고, 그 어렵다는 과거급제를 통해 증용되었으며, 남인을 형성하여 활동한 류성룡의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 <징비록>을 소개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임진왜란 한복판에서 쓰여진 전장의 일기라면, 류성룡의 <징비록>은 전란에서 달아나고 또 달아나며 쓰여진 역사책에 가깝다. 7년에 걸친 전쟁의 원인과 전황 등을 기록한 이 책 속에는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는 물론 서애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비판까지도 기록되어 있다. 첫 장에서 전쟁의 참사를 회고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기에, 앞날을 대비하여 반성의 기록을 남긴다는 저술 목적이 적혀 있다는 점에서 징비록은 한반도에서 씌어진 각종 기록문학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징비록을 이야기하며 임진왜란을 빼놓을 수 없고, 임진왜란을 말하면서 이순신을 말하지 않을 수는 없다. 1598년, 노량 앞바다에서 전사하기까지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채 조선의 남해를 누비며 왜군을 무찌르는 영웅이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의 왜란이 끝났을 때, 선조실록의 사관은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격파했다고 기록해 둘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이순신을, 왜란이 시작되기 전에 천거하여 전라 좌수사에 앉힌 것이 류성룡이고, 그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이다 못해 패망이 가까워보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한 사람도 류성룡이었으며, 임진왜란 동안 영의정으로 조선 조정을 지휘한 사람이 류성룡이었다. 
휘몰아치는 전쟁과 정쟁 가운데에서도 "어쨌거나" 살아 남았고, 말년에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복권되어 조정에서 제발 오셔서 일해주십사 요청했는데도(어...?) 일절 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노년의 현명함에 감탄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서애의 식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람을 보는 눈, 시류를 보는 눈, 이미 벌어진 일일지언정 반성을 통해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당연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일을 해 내는 심성 같은 것들이.




식(識)은 사물을 인식, 이해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함이니, 식성은 인식이나 이해를 잘 하는 천성(天性)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제공 한국고전용어사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