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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01902 / 비율] Highlight the remarkable by 에일레스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이 모든 분야에서 대립하던 냉전 시대에 가장 큰 화제 중 하나는 바로 우주 개발 분야였다. 소련은 미국에 앞서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한데 이어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를 태운 위성을 쏘아보내는데 성공했고, 최초의 우주인인 유리 가가린이 지구 궤도를 도는데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미국 나사(NASA)는 비상이 걸리고, 우주 진출 프로그램인 '머큐리 7'에 사활을 걸게 된다.

 

거기에, 그녀들이 있었다.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6)

 

관람객 9.36 (1,065)

기자·평론가 6.75 (8) 

개요 드라마 2017.03.23. 개봉 127분 미국 12세 관람가

감독 데오도르 멜피

 

 

 

영화 <히든 피겨스>는 나사에서 근무하여 우주 개발 프로젝트에 크게 기여한 세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수학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캐서린 존슨과 엔지니어로 탁월한 메리 잭슨, 리더쉽이 좋은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 세 사람이 그들이다.

당시 나사에서는 흑인 여성들이 인간 컴퓨터로서 우주선 발사에 필요한 모든 수식을 직접 계산하고 있었다. (Compute 라는 단어가 계산하다 라는 뜻이라는 것을 새삼 알았다..) 이 중 캐서린은 '머큐리 7'을 진행하는 스페이스 태스크 그룹에 전산원으로 합류하게 된다.

 

60년대는, 아직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극심하던 시대였다. 흑인은 백인과 같은 화장실을 쓸 수 없었고, 도서관조차도 흑인 섹션이 따로 있어 그 곳만 이용이 가능했다. 버스에서도 백인과 분리되어 따로 앉아야 했고, 백인과 같은 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다.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했다. 캐서린은 가장 핵심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나사의 대부분을 차지한 백인 남성들은 캐서린을 계산하는 도구 정도로만 생각했고 캐서린이 일하는데 필요한 정보조차 캐서린에게 주는 것에 인색했다.

 

 

 

 

엔지니어 쪽에 재능을 보이는 메리와 엔지니어 책임자인 질린스키의 대화가 바로 그런 부분을 잘 보여준다. 메리가 백인 남성이었다면 이미 엔지니어가 되었겠지만, 흑인 여성이기 때문에 전산원으로만 일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 대화 이후로 메리는 엔지니어 쪽으로 좀 더 욕심을 내게 되고, 나사의 엔지니어 교육 프로그램에 지원을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메리는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백인 학교에서의 수업을 이수해야 했고, 그 수업을 듣기 위해 법원의 판결을 받아야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직 멀기만 한 우주를 향한 꿈보다도 흑인 여성이 엔지니어가 되는 꿈이 더 불가능하게 여겨진다니. 그러나 저 당시에는 정말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일과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이 있었고,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 캐서린은 미국 최초로 지구 궤도를 비행하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결정적인 수학 공식 계산을 해냈고,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에도 기여했다. 메리는 나사는 물론 미국 최초의 흑인 항공 엔지니어가 되었고, 도로시는 나사 최초의 흑인 관리자가 되었고 포트란 전문가로서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두둥)

 

아주 오랫동안, 그들의 역할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이 영화의 제목이 '숨겨진 숫자들' 또는 '숨겨진 인물들'로 해석될 수 있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인 이유다.

오바마 대통령이 실제 인물인 캐서린 존슨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이 지난 2015년이고, 나사가 캐서린 존슨의 이름을 딴 연구시설을 개소한 것이 2017년이니,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거의 50여년이 걸린 셈이다.

 

이렇게 된 요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한가지일 것이다. 주류인 백인 남성 사회에서 흑인 여성인 이들의 역할을 축소하고 지웠던 것이다.

 

 

 

 

이 사진은 2018년 칸 라이언즈 광고제에서 수상한 독일의 형광펜 브랜드 스타빌로의 광고이다. Highlight the remarkable. 주목할만 한 사람을 강조한다는 의미이다. 수많은 백인 남성들 사이에 있는 캐서린 존슨을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그 위에 이름과 업적을 기재했다.

이 사진만 봐도 백인 남성들이 얼마나 절대적인 다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캐서린 존슨을 제외하면 여성은 가운데 있는 한명 정도만 보인다.

 

이것은 백인 사회에서 흑인 여성이 능력을 인정받기가 얼마나 어려웠던 것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캐서린 존슨은 물론 빼어나게 뛰어난 사람이 맞다. 그런데 나사의 컴퓨팅 그룹에는 캐서린 외에도 수십명의 인간 컴퓨터로 일하는 여성들이 존재했고, 그들 역시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여기 사진 속에 있는 대부분의 백인 남성들보다 그들의 능력이 부족했을까? 다만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능력을 발휘할, 능력을 인정받을 '기회'가 아니었을까?

 

 

 

'유리 천장'이라는 말이 있다. 이걸 인정 안하는 사람들도 있는가보더라만 분명히 유리 천장은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이 별 무리없이 올라가는 자리를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견고하여 부수기 어려운 유리 천장이 가로막고 있다. 그걸 부수기 위해서는, 일단 많은 사람들이 그 유리 천장을 인지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많이 멀어보인다..

언젠가는, 세상은 도달하게 될 것이다. 유리 천장 너머의 그 곳에.

그 날이 최대한 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