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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01812 / 눈] 첫눈빵배 첫눈빵 by 란테곰.

헉헉헉. 평소엔 바라보기만 했던 동네의 오르막길을 끝까지 뛰어오른 나는 전봇대에 기대 숨을 고르고 있었다. 터질 것 같은 허벅지를 손으로 두드리면서도 연신 좌우로 고개를 돌려 쫓아오는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앞으로 15분만 더 도망가면 된다. 딱 15분만.

 

’첫눈빵배 첫눈빵‘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때는 그저 단순한 놀이로 생각한 것이었다. 고려 시절 첫눈을 선물해주면 첫눈을 받은 사람은 술이든 밥이든 이른바 ’첫눈빵‘을 샀다는 풍습에 더해 그 상품을 대전 유명한 빵집의 첫눈빵으로 끼얹어본 것이었다. 우리 동네는 첫눈이 늦어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지만 이미 진행한 많은 동네들에선 첫눈이 묻은 편지를 상대편 집으로 보낸 '퀵빵'은 물론이요 새벽에 상대편 집 마당에 편지를 놓아두고 밤새 기다렸다가 다음 날 아침 편지를 집어 올린 사진을 찍어 증거로 올린 '파파라치빵'에다가 동네 이장님을 섭외해 민방위 통지서에 첫눈을 묻혀 전달한 '통지서빵'까지 다양한 전략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른 동네 첫눈빵을 지켜본 우리 동네 참가자들은 자체적으로 룰을 더하기로 했다. 반드시 직접 전달해주되 목표의 몸에 손을 닿는 것으로 ’직접’을 인정하는 터치 룰, 첫눈을 전달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좀비 룰을 더한 것이었다. 결국 누군가에게 터치 당하면 첫눈을 선물 받아 술래가 되고, 술래는 점점 늘어가 결국 끝까지 첫눈 선물을 받지 않는 1인이 우승하는 데스 매치였다. 마지막 1명이 남았을 적에 술래와 최후의 1인 모두에게 상황 공지가 되며, 최후의 1인은 공지 이후 20분을 버티거나 특정 장소에 자신의 첫눈을 가져다 놓을 경우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성공하면 대전 유명 빵집의 첫눈빵은 최후의 1인이 독식하고, 최후의 1인이 실패하면 최후의 1인이 전부 사고 술래들은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가는 것으로 정했다.

 

마지막 한 명이 될 경우 리스크가 급격히 높아지는 상황. 그래서 다들 얼른 잡혀서 술래가 되려 애썼다. 나도 그랬다. 인생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목표였는데... 난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내가 최후의 1인이 되었다는 공지 문자가 와서 헐레벌떡 도망을 쳤고, 지금 터질 것 같은 허벅지를 끌고 올라간 동네 오르막길 끝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이었다.

 

왼쪽도 오른쪽도 골목이 있고, 계단을 통해 동네 야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 있는 이곳은 도망치기에도 주변을 살피기에도 최적의 장소였다. 문제는 체력이었다. 여섯이나 되는 술래들을 따돌려가며 도망칠 수 있을까? 아니, 아니면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숨어 버틸 수 있을까? 아니. 그렇다면 그냥 포기할까. 그러자니 지금껏 뛴 것이 아까운데. 그때였다. 왼쪽 골목 끝에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역시 오른쪽 골목 끝에도 사람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남은 길은 야산 밖에 없구나 싶어서 몸을 계단 쪽으로 돌린 순간 양쪽 골목 끝에서 보였던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데 뭔 소리인지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귀 기울여 들을 여유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계단으로. 하지만 이미 풀리다 못해 녹아버린 것 같은 허벅지 근육은 도통 속도를 내지 못했다. 발을 끌 듯 겨우 오른 야산 끄트머리엔 정자가 있었고, 난 그 정자 밑에 몸을 숨겼다. 몸을 숨긴 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계단을 통해 사람들이 올라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세상에, 술래 여섯 명이 전부 올라왔다. 숨을 자리는 여기 말곤 없어서 누가 봐도 뻔한데. 아오, 어쩌지, 첫눈빵이 얼마더라. 여섯 명이면 얼마지. 역시 초반에 무조건 술래가 되었어야 했는데 등등을 떠올리던 중. 삥뽕. 하고 핸드폰에서 들려온 문자 왔다는 소리에 머리카락 끝까지 소름이 돋은 기분이었다.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몸을 일으켜 정자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술래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그리고 각자의 핸드폰을 지켜 보고 있었다. 뭐지 싶어 꺼내본 핸드폰엔 내가 20분을 버텨서 1등을 했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1등이란다! 야르! 오늘 밤은 치킨이닭! 수많은 드립들이 떠오르고 이것 중 뭘 말해야 좋을까를 고민하며 나는 입이 귀에 걸린 채 술래들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술래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몸에 붙잡는 등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날 보며 희희낙락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아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 만면에 미소를 담은 채 서 있던 한 명은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아이고 내가 본 문자가 낚시였다니. 여섯 명이 짜고 나 하나를 속인 셈이었다. 애초에 최후의 1인은 아직 생기지도 않은 상태였고, 난 나에게 문자 낚시를 보낸 사람에게 낚여 혼자 신나게 파닥거린 것이었다. 날 붙잡고 있는 다섯 명도 나도 문자로 날 낚은 사람도 모두 빵 터져 한참을 웃었다. 말 그대로 제대로 낚였던 나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웃는 것 외엔 할 말도 없었다.

 

 

 

...라는 꿈을 연말부터 시작해 오늘까지 주욱 이어서 꿨다. 새해 시작부터 낚시를 당한 셈이다. 아홉 수 액땜을 화려하게 시작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