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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01901 / 덕후] 팬 by 에일레스

 

오타쿠-라는 단어를 들은 것은 사실 꽤 오래된 일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전격 개방되고 난 2000년대 초반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등에 심취한 사람을 흔히 일컫던 이 단어는 점차 한국화(?)되고 대중화(!)되면서 오덕, 덕후, 덕-등의 변형을 거쳤고 현재에 와서는 특정 분야나 대상에 몰두한 사람들 두루 칭하는 말이 되었다. 요즘에 와서는 '열성팬'이라는 단어의 조금 심화 버전(?)같이 사용되는 것 같다. 

 

나는 한가지를 깊게 파기 보다는 여러가지를 얕게 파는 스타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품목들(?)이 간혹 덕후라 불리는 사람들의 기호 아이템인 경우가 있어서 일부 지인들에게서 덕후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덕후라기엔 난 너무 라이트하지.. -ㅅ-

 

오늘 소개할 영화는 그래서, 그 열성팬- 진성 덕후를 다루는 영화이다.

 

 

 

 

더 팬 (The Fan, 1996)

네티즌 8.63 (262) 평점주기
개요 드라마, 스릴러 1996.10.19. 개봉 109분 미국 청소년 관람불가
감독 토니 스콧

 

 

 

 

영화의 첫 장면.

흑백 사진이 보이면서 낮게 나레이션이 깔린다.

이 나레이션이 사실상 이 영화의 내용을 모두 보여준다고 해도 무방하다.

 

 

 

야구 개막일을 하루 앞두고, 주인공 길 레너드는 라디오의 스포츠 방송과 전화 연결이 되어 기쁘게 통화를 하고 있다.

자이언츠의 열성팬인 그는 가장 좋아하는 선수인 바비 레이번이 자이언츠로 이적되어 오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바비와도 통화할 수 있게 된 길은 그에게 자신의 특별한 응원을 전하고 즐거워한다. 좋아하는 선수와 전화 통화를 하다니, 소위 말하는 '성덕'이 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구 외의 현실에서 길은 피곤한 삶을 살고 있었다. 칼(Knife) 영업사원인 길은 실적이 없어서 회사에서 계속 쪼이는 상태였고, 이혼한 전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전처가 키우는 아들을 만나기도 힘든 상태였다.

 

길은 사회성이 부족하고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야구에 지나치게 몰두해있고, 특히 과거에 자신이 야구하던 시절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에 공격적인 태세를 보인다. 길은 영업하는 과정에서 만난 업체 담당자가 시종 시큰둥하게 반응하다 시덥잖은 말을 던지자 금세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내고, 야구장에서는 홈런볼을 잡기 위해 달리다가 아들의 다리를 밟고 지나갔는데도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 경기를 보다가 흥분해서 계속 서있는 바람에 뒤쪽 관중들과 시비가 붙자 욕설로 대응하며 싸운다. 전처로부터 아들에게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 후에도 초등 야구부 경기를 하는 아들을 보러 갔다가 난동을 부린다.

마침내 길은 회사에서도 해고당하고, 더더욱 야구와 바비에게 집착하게 된다.

 

 

 

 

길의 과도한 집착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이 장면이다. 그는 바비의 집 부근에서 쌍안경으로 바비가 아들과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곤 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스토킹이다.

 

바비는 개막전 이후 이유없는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바비는 그것이 자이언츠 팀에 오면서 자신의 원래 등번호인 11번을 쓰지 못해서라고 생각하고, 현재 11번을 쓰고 있는 프리모에게 등번호를 바꿔달라 요구하지만 프리모는 들어주지 않는다. 길은 바비가 잘 가는 술집에 갔다가 우연히 둘의 싸우는 소리를 듣고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바비는 슬럼프로 인해 인기도 떨어지고 해서 만회하는 의미로 다시 라디오 방송과 전화 인터뷰를 하게 되고, 또다시 길과 전화 통화를 하게 된다.

 

 

 

 

길은 바비의 등번호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거기에 고맙다고 답한 바비의 말을 녹음하여 반복해서 듣는다.

"당신이 프리모와 얘기해야 할까봐요. 난 도움이 많이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길은 진짜로 프리모를 설득하러 그가 있는 사우나로 찾아가고, 프리모와 몸싸움 끝에 그를 죽이고 만다.

 

프리모의 죽음 이후 거짓말처럼 바비는 슬럼프에서 벗어나 다시 승승장구하기 시작하고, 길은 그것에 대해- 프리모가 없어진 덕분이니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바비가 답하는 것을 보자 의아해한다.

어느날 늘 그렇듯 바비의 집 주변에서 바비 부자를 훔쳐보던 길은 바다에 빠질 뻔한 바비의 아들을 구해준다. 그 보답으로 바비는 길을 집으로 초대하고, 길은 짐짓 다른 사람인 척을 하면서 바비와 대화를 나눈다.

 

 

 

 

길은 바비가 팬을 위해 뛰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경기를 해야 한다고 하는 대답을 듣고 표정이 굳는다. 그것은 평소의 자신의 믿음과 너무나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길은 바비에게 정공으로 묻는다.

 

 

 

 

바비가 다시 성적이 좋아진 것이 프리모가 없어진 덕분이라고, 고맙다고, 그 말이 듣고싶었던 길은 바비의 대답에 크게 실망한다. 원래 팬이었다가 안티로 돌아선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다. 길이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도움을 알아주지 않는 바비에게 복수 아닌 복수를 펼치는 것이 영화의 후반부의 내용이다.

 

 

 

길은 바비에게서 무엇을 봤을까.

길이 바비의 열렬한 팬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길의 비밀 장소에는 그가 직접 모아놓은 바비의 기사 스크랩들이 사방에 붙어 있었다. 야구선수로서의 바비를 길은 정말 좋아했다. 바비가 잘 칠 때는 물론이고, 그렇지 못할 때도 그를 응원해왔다. 그러므로 바비가 말한 광적인 팬이랑은 조금 다른 방향을 걷던 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길에게 있어 야구는 그의 행복한 순간을 상징하던 것이었다. 야구를 하던 과거의 그는 잘 했고, 잘 나갔고, 모두들 자신을 칭찬했다. 사람들과의 사이도 좋지 않고, 가정도 직장도 잘 풀리지 않는 현실에서 야구는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이었고, 바비는 그가 감정을 이입한 대상이었다.

길은 바비처럼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면, 바비에게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같이 팀으로서 플레이를 하면서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현실에서 그가 받지 못하는 그것, 인정 말이다.

 

길과 바비가 대치하던 마지막 순간, 나에게 뭘 원하냐고 묻는 바비에게 길은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그러면서 자신의 최고의 피칭을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마운드로 발길을 옮기던 그 때, 길은 야구장 전광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길은 몸을 곧추세우며 전광판으로 비치는 자신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길은 손에 칼을 들고 와인드업 자세를 취한다. 칼은 현실의 그가 얽매여 있는 물건이다. 그가 말한 최고의 피칭이란, 그의 현실을 내던지고 영광스러운 순간으로- 그가 거의 환상처럼 꿈꾸던 자리로 향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길은 바비의 열혈팬이기에 앞서, 스스로의 열렬한 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가 마지막으로 칼을 던지려 하던 그때야말로 길이 가장 원하던, 진짜로 최고의 순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