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9년

[201902 / 비율] 50% 의 비극 by 김교주

특별히 경제나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라는 제목 정도는 들어봤을 것 같다. 세기의 베스트셀러이자 지금도 심심치 않게 관련 분야에서 회자되는 책이니까.
장 지글러가 이 책을 쓴 지 이미 20년이 지났고, 제목에서 말하는 50%는 정확한 비율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수치에 가깝다. 세계는 변했고, 기아와 빈곤으로 죽어가는 이들의 숫자도 달라졌다. 그러나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그 변화가 점점 더 가난한 이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의 상황을 보여주는 수많은 비디오들이 실제보다 과장된 포르노에 가깝다는 비판이 있는 반면, 신자유주의와 돈의 논리에 의해 피할 수 있는 굶주림을 피하지 못해 죽어가는 이들의 현재를 그 어디에서도 정확히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성찰도 존재한다.
지글러는 자신의 아들과 나누는 대화의 형식으로 책을 집필하면서 이런 이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존재하지 않고(어디까지나 책의 서술 방식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빈곤과 기아의 참담함에 대해서는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알 수는 있어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저자의 화법은 과장이나 호들갑스러움 없이 담담하다.

많은 경우에서 그렇듯,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가 지금 마시는 이 한 잔의 커피가,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치즈 한 조각이 어떻게 여기까지 와 있으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책을 읽고 나서 한참이나 나를 고민스럽게 만들었다.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여러 군데를 고친 흔적이 있고, 지금의 우리에게는 결코 피해가거나 무시할 수 없는 북한의 이야기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미 세계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배불리 먹일 만큼의 먹을거리들을 생산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어딘가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제대로 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여기에 대해 얼만큼의 부끄러움을 갖고 살아야 할까.

매월 급여에서 얼마큼을 떼내어 말리의 소년에게 보낸 지 5년이 넘었다. 그래도 그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그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에 속할 것이다. 말리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도 많은 금액을 내가 보내고 있으니(그걸 그가 다 받게 되는지는 의문이지만) 최소한 굶어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학교에 다니고 있고, 가끔은 내게 편지를 보내오고, 세이브더칠드런의 직원이 찍어준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건강한 모습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을 때도 있다.
테러의 위험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축구 선수를 꿈꿀 수 있을 정도의 안전함은 누리고 사는 그의 옷차림은 그러나 남루하고, 표정은 밝지만 편지에는 점점 더 생활의 무게가 담긴다. 이제 겨우 열 두살 소년인데도. 그래서 나는 내가 아주 어려웠던 어느 한 해동안에도 차마 지원을 끊지 못했다. 내가 그 알량한 지원마저도 끊어버리면 그는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를 잡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는 이 책을 읽고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대체, 지구상에 그나마의 도움조차 닿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극소수의 인간을 배불리기 위한 지금 이대로, 우리는 괜찮은가. 인류애와 자아성찰 따위가 득세하는 날은, 오지 않는 것일까.

이 책의 후속작인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를 사 두었다. 거기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면, 그건 분명히 욕심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