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0년

[201002 / 여행] 떠남의 미학, 여행. by 김교주

가끔 멍하니 사무실 창밖을 내다보며 불쑥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사람들은 에너지가 바닥에 달했을 때 그 에너지를 다시 채우기 위해 여행을 결심한다지만 사실 제게 여행의 묘미는 바로 떠남 그 자체에 있습니다.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숱한 다른 것들보다도 "훌쩍 떠남"의 홀가분함을 즐기고 싶어하는 심리가 제게 내재되어 있나봅니다.


여행이라는 주제어가 던져졌을 때의 암담함을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여행은 그다지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 않고,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너무 오래 전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제가 이 블로그 필진으로 맡고 있는 분야는 문학이니 제대로 감도 오지 않는 주제어를 붙들고 그간 읽었던 책들을 머리 속에서 다시 한 번 그려보는 어려움까지를 극복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된 셈이었던 겝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실은 <어린왕자> 한 권으로 이 한 해를 버텨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진정한 명작이라 할만 합니다. 결코 길지 않은 한 권의 책 속에 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요. 사랑, 이별, 죽음, 만남 따위 삶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이 전부 말입니다. 여행에 대해서라면 말할 것도 없죠. 이 책의 내용 자체가 어린 왕자의 여행 이야기 아니던가요. ... 각설하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작년 9월 말, 아주 오랜 시간을 제 곁에 머물던 친구가 꽤나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책을 읽기는 커녕 물 한모금 넘기기 쉽지 않던 그날들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 친구를 온전히 보내주기 위해서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었지요. 모친께서 챙겨주신 기내용 손가방 속에서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백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도스토예프스키 (열린책들, 2007년)
상세보기

아마 모친께서는 단지 긴 여행동안 지루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넣어 주셨을 겁니다. 여쭈어 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이 부모님 댁 서가에 꽂혀 있던 것도 모친보다는 아버지의 영향이기가 쉽습니다. 모친께서 즐겨보시는 책들은 보통 잠언집이나 시집이지 러시아 문호의 소설집은 아니니까요. 어쨌든, 그때까지 이 작품을 읽지 않았었던 저는 무심히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잠시 난기류를 만나 덜컹거렸고, 제 옆에서는 그 친구의 어머니가 졸고 계셨죠.


이 책은 너무도 이기적인 한 여자와 지나친 몽상가인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백야> 속에서 <죄와 벌>을 집필한 대문호의 무겁고 버거운 필치는 잠시 그 모습을 숨긴채 드러나지 않습니다. <백야>를 쓸 때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어쩌면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작품의 서정성은 발군(이렇게 말해도 좋다면)입니다.


책을 덮었을 때에도 비행기는 여전히 어둠 속을 가르며 홍콩 공항에 둔중한 기체를 착륙시키기 위해 날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저 역시 무거운 마음과 괴로움 심사를 다스리지 못한채 하염없이 한숨을 토하고 있었고요. 하지만, 대신 한 손에는 책을 꼭 쥔 채 눈가에 조금 다른 의미의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더랬습니다. 그 친구와 사랑을 하는 동안 나는 얼마나 이기적이었을까, 그 친구는 나를 어떤 의미로 사랑했을까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나첸스카의 모습이 나를 닮았다기보다는 화자의 모습이 그 친구를 닮아 있어서 참 많이 괴로워했더랬습니다.


조금쯤 생뚱맞고 억지스럽지만, 그 친구가 그토록 먼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제가 그 친구를 보내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 않았더라면, 저는 그런 심리로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떠남이란, 여행이란, 이래서 늘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존재하는 명사인겁니다.


겨울도 다 지나가는 2월, 여러분께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추천합니다. 당신의 삶 어디쯤에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와 그 백야를 함께 보낸 연인이 있으리라, 혹은 함께 보낼 연인이 생기리라 믿으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