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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01002 / 여행] 비참함의 쾌락을 위한 허세여행 by 빛바랜편지

 여행? 내가 제대로 된 여행이란걸 가본 적이 있던가?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여행과 관련된 노래는 떡하니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지만 내 경험속의 여행은 떠오르질 않았다. 겨우겨우 몇가지 꼽아보아야 그건 '나들이'수준이었다. 아직 여행다운 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함에 부끄러움이 엄습한다. (사실은 마침 지금 여행이라 불릴 만한 것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둔 상태라 글을 쓰는 이 시점이 심히 아쉽다.)

 내게 여행의 의미는 다양한 체험을 통해 견문을 넓히는 원대한 것보다는 차분한 사색과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 정도가 익숙하다. 좀 더 캐주얼하게는 가보지 않아 궁금한 장소를 재미삼아 답사해보는 것의 의미도 있고 분위기를 즐기는, 일종의 허세의 의미도 있다. 그 의미에 충실하여보니 여행의 기능을 수행했던 나의 행동들이 몇가닥 보이기 시작한다.

  이병률의 「끌림」에는 파리를 여행하는 것이 직업인 청년이 나온다. 그 청년은 파리 토박이임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파리를 여행하고, 곧 파리로 여행을 떠날거라고 한다. 그 청년이 어떤 의도로 파리여행을 다녔는지는 모르겠다. 역시나 나는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서울과 그 근교를 여행했다. 내가 보기에, 서울은 각 장소마다 다른 분위기와 표정을 가졌고 머무르는 사람들의 느낌도 다르다. 따라서 내가 어떤 느낌을 받고싶냐에 따라 장소를 정할 수가 있다. 특히 마음이 쓸쓸하고 우울할 때는 4대문 안쪽과  그 근처를 찾게된다. 특유의 신.구 공존에서 오는 쾌락감이 있고 단정하고 진지함이 있다. 그 곳에서는 잔뜩 생각에 잠겨서 걸을 수 있다. 방향은 생각지 않고 어디로 걷든 마음에 드는 곳이 나온다.

 3년 전 쯤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명동에서 패밀리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했던 나는 퇴사서를 쓰고 거리로 나오게 되었다. 날씨는 춥고 거리는 커플로 넘쳐나고 조명은 화려하다. 지나간 기억들이 흐릿하게 스쳐간다. 내가 초라해지기 시작한다. 슬슬 허세가 시작된다. 안되겠다, 좀 걸어야겠다.

 최초의 목표는 시청까지 걷는 것이었다. 눈물이 쏙 빠지는 칼바람을 맞으며 꾸역꾸역 종각역을 지나 시청까지 걷는다. 빨리 걸었던 것도 아닌데 아쉬움이 남아 더 걷기로 하다보니 광화문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미친듯이 걷다보면 생각의 폭이 다양해지고 깊어진다. 마라톤 러너들의 '러너스 하이'와 비슷한 현상일까, 걷는 동안에 마음이 가뿐해지고 어떤 정리도 일어난다.

 광화문 모 건물앞 광장에 도착하니 구세군 자선냄비가 있기에 5천원을 넣는다. 그 뒤에 배스키라빈스31이 보인다. 추운 날씨에 아이스크림까지 사먹어보면더  초라함을 경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보스턴 크림파이를 하나 사들고 먹으면서 광화문 근처를 휘휘 돌아봤다. 내 모습을 돌아보니 고독한 도시남자가 보였고 난 뿌듯했다.

 귀에는, 암담하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Bjork의 음악이 흐른다. 정말 비참한 생을 사는 분들께도는 죄송한 얘기지만, 그래 이제 충분히 그리고 적당히 비참하다. 여기에서 오는 쾌락이 있다. 아, 나는 여기까지는 아니구나. 이 상태보단 위에 있구나. 알콜과 함께 세월을 한탄하는 것보다는 나름 고상하고 점잖게 우울을 이겨낼 수 있다. 이 때의 느낌은 잊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1년 쯤 뒤, 나는 비슷한 우울증세로 같은 코스를 밟아보았다. 날씨는 그 때보다 춥지 않았고 주머니에는 자선냄비에 5천원을 넣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배스킨라빈스31에서는 보스턴 크림파이가 더이상 나오지 않았고 그마저 차선으로 골라 콘에 담은 쿠키앤크림 아이스크림은 종업원에게서 받고 돌아서는 순간 스스로 장렬하게 바닥으로 투신했다. 부끄러운 데다 기분이 상한 나는 콘을 버리고 나와버렸다.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한 허세여행은 아무때나 하는게 아니거나 혹은 더이상 나에게 맞지 않는 방법이거나.

 그 뒤로도 쭉, 강북의 도심을 걷는 일은 내 기분을 한결 낫게 해 주었다. 이제 '비참함'까지 원하진 않는다. 강남과는 달리 정리되고 차분한 느낌이 나는 사람들을 마주치고 현대도시와 고도(故都)가 공존하는 느낌의 강북 도심을 걷는 것 만으로도 또 다른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내 허세라이프가 어떻게 흘러갈 지는 모르나 비참함에서 오는 쾌락에서 강렬한 절정을 느낀 나는, 그 날의 기억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기억이 나를 다시 서울로 불러들인다. 더욱 허세충만하게 만든다.



Bjork - Hunter

If travel is searching
and home what's been found
I'm not stopping

I'm going hunting
I'm the hunter
I'll bring back the goods
but I don't know when

I thought I could organise freedom
how Scandinavian of me
you sussed it out, didn't you?

You could smell it
so you left me on my own
to complete the mission
now I'm leaving it all behind

I'm going hunting : I'm the hunter

(You just didn't know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