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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01710 / 흰머리] 술자리 by 란테곰.


 

오랜만에 만났으니 악수를 하자며 내민 손에는 거칠어졌다는 말로는 모자랄 정도로 굳은살이 여전히 손바닥 전체에 박혀있었다. 냉장고에서 소주를 한 병 꺼내 맥주잔 두 개에 가득 채우고는 한 잔을 쭈욱 마신 뒤에야 식사를 시작하는 그의 얼굴엔 세월의 흐름과 삶의 풍파가 새까만 피부와 깊은 고랑으로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두었다. 어렸을 적 머리에 화상을 입어 속알머리 없이 살아왔다던 그의 머리 위엔 왼쪽을 길게 길러 덮어놓은 머리칼이 있었다. 그나마도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휑한데다 희끗희끗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흰머리의 비중이 높았다. 

  

넌 안 먹냐. 집에서 혼자 술 자주 마시긴 하는데 그럴 때는 소주 안 마셔요. 정말 힘들 때 아니면. 오늘은 혼자 아니잖아. 마셔도 되겠네. 아이고 참, 핑계가 없네요. 그가 내민 잔을 받아 그처럼 꿀꺽꿀꺽 잔을 비웠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순간 역류하는 소주를 견디다 사례가 걸렸다. 한참 켈룩거리는 내게 그는 물을 내밀었다. 무식하게 먹지 마. 네, 먹던 대로 먹을게요. 쓰린 목구멍에 물을 밀어 넣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연애는 안 하냐. 아이고 참, 이런 상황에서 만나봐야 상대한테 기대기만 하고 상처만 주더라구요. 그러냐. 한 잔 하자. 나는 삼분의 일, 그는 잔을 비웠다. 새 소주병을 꺼내 빈 잔을 채웠다. 

 

동생은 잘 지내냐. 그의 질문에 난 쉬이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그는 내 표정을 보고서는 얕은 한숨을 쉬며 미안하다 했다. 미안할 일은 아니지요. 새로 꺼내온 소주병을 들어 그의 빈 잔을 채우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떻게, 잘 지내십니까. 응. 뭐. 그냥 열심히 사는 거지. 여기나 거기나 별 차이 없어. 아, 헛생각하지 마. 그래도 여기가 더 낫다. 어떤 점이요. 이거. 라는 대답과 함께 그는 다시 한 번 소주로 가득 찬 맥주잔을 비웠다. 여전하시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난 다시 빈 잔을 채웠다. 이럴 때나 마시는 거지 뭐. 라는 말과 함께 그는 또 잔을 비웠다.

 

네 병쯤 비웠을 무렵,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갈게. 라며 인사를 했다. 바쁘세요. 응, 뭐. 거기서도 일은 있으니까. 그러시구나. 문을 열고 배웅을 나섰다. 밖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여기까지만 나와. 네. 동생 잘 챙기고. 네. 자, 한 번 안자.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달려가 가슴 가득 그에게 안겼다. 한참을 안았다 떨어지자 그는 말했다. 어, 너도 흰머리 난다야. 아이고 그건 또 언제 보셨대요. 그럴 나이잖아요. 벌써 그렇게 됐냐. 네. 지금 힘들어도 열심히 살아. 네, 전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니까. 이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 누가 뭐라 해도 그게 사람처럼 사는 거야. 그리고 미안하다. 에이, 아니에요. 또 오세요. 오랜만에 뵈니까 좋네요. 그래. 갈게.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가는 그의 뒷모습이 아련해질 무렵, 난 큰소리로 외쳤다. 아부지, 다음엔 엄마도 데리고 와요. 한참 작아진 그가 뒤돌아보더니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안개 속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끝까지 지켜보다 안개가 그를 삼킨 후에야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