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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01709 / 역모] 아름다운 라스트신 by 에일레스

대학 다니던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영화관에 갔는데, 곧 개봉 예정인 영화의 포스터가 판넬로 제작되어 놓여 있었다. 거기서 초면인 어떤 배우의 얼굴을 보면서 어머 정말 예쁘게 생겼다-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 포스터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당연히 이준기..

얼마 후 영화가 개봉했고, 영화는 알음알음 소문을 타며 점점 흥행을 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n차를 찍는다'는 개념을 만들어낸 최초의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인터넷 게시판마다 '몇차를 찍었다'고 하는 글들이 어마어마하게 올라왔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그 전까지 한국영화 흥행 1위였던 <태극기 휘날리며>를 제치고 1위에 오른다. 얼마 후 <괴물>에게 1위를 내주긴 하지만 말이다.

 

 

조선 시대에 광대란 하층민 중에서도 하층민, 가장 천한 계급이었다. 그러한 광대가 왕을 만나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영화 <왕의 남자>는 일견 설정 자체가 말이 되나?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연산군일기에는 공길이라는 광대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니 비록 곡식이 있은들 먹을 수가 있으랴" 라는 말을 했다가 참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모든 설정이 출발한 것이었다.

 

 

왕의 남자 (2005)

네티즌 9.02(34,053)
기자·평론가 6.67(6) 평점주기
개요 드라마2005.12.29 개봉119분한국15세 관람가
감독 이준익
내용 조선시대 연산조. 남사당패의 광대 장생(감우성 분)은 힘있는 양... 줄거리더보기
부가정보 공식사이트

 

 

영화 <왕의 남자>는 남사당패에서 활동하던 광대인 장생과 공길이 한양으로 올라와 육갑, 칠득, 팔복과 만나 새로운 형태의 놀이를 구상하면서 시작한다. 그것은 한창 장안의 화젯거리였던 왕과 후궁인 장녹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놀이는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의금부에 잡혀가게 되고, 장생은 패기있게 왕 앞에서 놀이를 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내관인 김처선은 왕을 웃게하지 못하면 죽게 된다는 조건으로 장생과 그의 무리를 왕 앞에 데려간다.

 

왕 앞에서, 긴장도 하고 이래저래 잘 풀리지 않던 놀이는 공길이 적극적으로 나선 덕분에 왕이 파안대소하면서 무사히 마무리된다. 왕은 광대패를 궁 안에 머물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것은 중신들의 반발을 산다.

이 장면은 연산군이 매우 속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중신들의 말처럼 법도를 중요시하던 선왕과는 달리, 연산군은 여느 백성들처럼 광대패의 저속한 농담에 즐거워한다. 이것은 연산군이 그다지 왕으로서의 어떤 체통이나 근엄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또 한편, 광대들이 우습게 묘사하는 대상이 왕 그 자신과 자신의 후궁인 장녹수였는데도 특별히 내용에 대해 트집잡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연산군이 그다지 꽉 막힌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뒤에 광대패들은 이번에는 왕이 아닌 중신들-양반들을 대상으로 놀이판을 꾸미는데, 이때도 연산군은 즐겁게 웃는다. 그리고 뇌물을 받아먹은 중신을 그 자리에서 적발하고 파직시킨다. 그 방법과 절차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어찌 보면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보이는 장면이다. 어쩌면, 연산군은 일을 제대로 하는 왕이 될 수도 있었다-는 암시같기도 하다.

 

<왕의 남자>는 아마도 연산군에 대한 이미지를 색다르게 묘사한 첫번째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 전까지 연산군은 광기에 사로잡히고 향락에 빠졌으며 폭정을 저지르는 폭군으로서의 모습이 강조되었던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왕의 남자>에서의 연산군은 광기 아래 내재돼있던 안쓰러운 모습을 보인다.

왕은 공길을 총애하여 처소로 불러 같이 인형놀이 등을 하는데, 여기서 왕이 직접 해보이는 그림자 인형 놀이에서 왕이 가지고 있는 깊은 상처를 처음으로 보여준다. 왕은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드는데, 그런 왕에게 동정을 느끼는 공길의 표정을 보여주는 이 부분에서 관객도 왕에게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과 관련하여 매정한 환경에서 자랐던 성장과정 등이 한 사람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김처선은 장생에게 책 한권을 줘서 그 내용을 가지고 놀이판을 만들도록 하는데, 이 내용은 하필이면 폐비 윤씨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놀이를 보며 깊게 감정이입을 한 연산군은 광기에 휩싸여 선왕의 후궁을 죽이고 대비마저 죽게 만든다. 물론 연산군의 패륜에 대해 참작을 해줄만한 부분은 아니긴 하나, 여기서도 연산군의 광기가 그 뿌리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마침내 연산군을 왕에서 끌어내리려는 역모가 시작된다. 성희안 등을 필두로 하여 시작된, 중종반정이다. 이 반정의 결과로 연산군은 폐위되고, 성종의 둘째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던 진성대군이 왕에 오른다.

영화 속에서, 궁으로 역모 세력이 몰려드는 동안에도, 연산군은 마지막 연회를 연다. 장녹수의 심복이던 내관이 와서 장녹수에게 다급히 알리는데, 장녹수는 물러가라는 손짓만으로 대답한다. 왕과 마지막을 함께 하겠다는 뜻을, 손짓 하나만으로 표현한 장면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의 장녹수가 너무나 우아하면서도 처연해보여서 이 부분을 좋아한다.

(그러나 사실 역사에 따르면 연산군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중전이 보고싶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중전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

 

 

궁으로 달려 들어오는 사람들, 마지막 한판을 놀아보자는 광대들, 그리고 그 마지막 한판을 바라보는- 어딘가 모르게 순수하기까지 해 보이는, 그래서 더 애잔한 왕.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개인적으로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라스트신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공동경비구역 JSA> 마지막 장면이랑 좀 엎치락뒤치락 한다.. 내 마음속의 순위 싸움..)

 

 

조선시대에 묘호를 얻지 못한 두 왕 중에서, 광해군은 현대에 들어 다양하게 재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연산군은 너무나 폭정을 저질렀던 왕이라 재평가되기도 어렵다고 들었다. 사실 꼭 재평가를 할 필요도 없다. 다만 뭔가 이렇게 새로운 해석을 해주는 것도 예술 작품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재밌다고 생각한다. 극심한 역사 왜곡만 아니라면 말이다. 

 

+

덧붙임.

개인적으로 연산군을 그린 영화 중 최악은 <간신>이었다. 진짜 김강우 열연이 불쌍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