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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01708 / 포기] '포기를 모르는 남자'에 대하여 by 에일레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땐 어쩜 그렇게 좋아하는 것들이 많았을까.

 

중고등학생 때까지의 나는 정말 좋아하는 것들이 많았다. TV를 좋아했고, 드라마도 좋아했고, 영화도 만화도 많이 봤다. 음악도 좋아했고, 글쓰는 것도 좋아했다. 농구도 좋아했고, 프로야구도 좋아했다.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를 꼽으라고 하면 한명만 말하는게 너무나 어려웠다. 장래 희망도 몇 번쯤 바뀌었던 것 같다. 학교 선생님들도 좋아했고, 친구들도 좋았다.

세상엔 싫은 것보단 좋은 것이 훨씬 많았다.

 

어른이 되어 가면서, 좋아하는 것들을 점점 잃어가게 된 것 같다. 요샌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다. 영화도 전처럼 열심히 안 보고, 음악은 거의 듣던 것만 반복해 듣는 것 같다. 스포츠 쪽엔 관심 끊은지 오래됐고, 좋아하는 뮤지션이 누구냐는 질문에는 정말 한참 고민을 해야 한다. 친구는.. 예전이랑은 나의 개념이 달라진 것 같다.

그렇다. 달라졌다. 내가 변했고, 내 주변 상황이 변했고..

그러는 가운데에 나는 점차로 좋은 것보다 싫거나 귀찮은 것들이 많아졌다.

어쩌면 내가 놓아버린 것들을 막연히 그런 식으로 취급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슬램덩크>는 90년대에 청소년기를 살아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접해봤을 작품이다. 좋아하는 여자아이 때문에 농구를 시작하게 된 풋내기 강백호가 서서히 농구선수로서의 재능과 열정에 빠지게 되는 과정이 주된 줄거리인데, 강백호를 비롯한 농구부원들 개개인의 매력과 매번 맞닥뜨리는 강한 상대팀과의 승부가 재미를 더해준다.

내가 <슬램덩크>에서 가장 좋아한 캐릭터는 정대만이었다. 그래서 이번 글의 주인공은 정대만이다.

 

 

 

 

정대만의 첫 등장은 다소 흉물스럽다 (...) 불량 청소년 모임(?)의 리더인 정대만은 농구부 2학년인 송태섭이 건방지다고 시비를 붙였다가 '한놈만 팬다'로 대응한 송태섭에게 맞아서 앞니가 부러진 저런 모습이 되었다.

 

 

 

 

중학 농구 MVP 였던 정대만은 시합 때 우연히 만난 북산고 감독 안선생님에게 감명을 받아 북산고로 온, 농구 꿈나무였다. 그러나 연습 중 당한 부상이 재발하자 농구를 그만두고 나쁜 길에 빠진 것이었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는 없었고, 그것이 농구부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나 자신이 잃은 것을 가지고 있는 송태섭을 괴롭히는 식으로 표현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 유명한 대사, '농구가 하고 싶어요' 가 나온다!

안선생님을 다시 만난 정대만은 그간 꾹꾹 감춰왔던 농구에 대한 열정을 다시 고백하고, 농구부로 돌아온다.

 

 

 

 

 

2년 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타고난 센스와 실력은 여전히 정대만에게 남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체력적인 부분이 계속 정대만을 괴롭힌다. 정대만이 체력이 떨어져 비틀대는 묘사가 작품 중에 몇 번이나 반복된다. 그럴 때마다 정대만은 지난 공백에 대한 후회를 크게 느낀다.

 

 

 

 

그러나 정대만은 이미 중학 MVP 시절을 뛰어넘은 상태였고, 본인만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나조차도, 이 만화를 몇번을 봤음에도, 정대만이 공백을 따라잡느라 노력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이렇게 안선생님의 입으로 정확하게 충분히 뛰어넘었다고 하는 대사가 있었네..

 

 

 

 

여기 또 나왔다. 정대만의 명대사.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전국대회 마지막 경기인 산왕전에서의 정대만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산왕에서 작정하고 정대만에게 마크를 붙여뒀던 탓에, 체력이 완전 방전되고 얼굴색까지 변했을 정도로 녹초가 되지만 계속해서 경기를 뛴다. 그 와중에 또 지난 과거에 대해 후회하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정대만은 3점 슛을 계속해서 성공시킨다.

 

 

 

 

무엇이 정대만을 그렇게 뛰게 만들었을까.

그건 좋아하는 것에 대한, 그것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순수한 열정 때문이겠지.

물론 정대만이 어리니까(작중 그는 고3, 18살로 나온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나도 어릴 땐 그랬다니까!!)

하지만 온통 농구에 미쳐서, 농구를 좋아해서, 이기고 싶은 열정으로 모든 것을 쏟아붓는 소년들이 가득 나오는 이 작품에서 정대만이 유독 돋보이는 것은, 그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돌아온 인물이라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사실 <슬램덩크>는 강백호 중심의 이야기로 대부분이 진행되고, 강백호를 제외하고는 개인사가 나오는 인물이 거의 없다. 서태웅은 농구에 몰두한 캐릭터라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정보도 나오지 않고, 비교적 많은 얘기가 보여지는 것 같은 채치수조차도 초등학생 때부터 전국대회 우승을 꿈꿨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정대만에게는 어떤 드라마가 있다. 밝고 기운찬 중학 MVP가 부상으로 실의에 빠져 어둠의 길로 들어섰다가, 다시 돌아와 포기하지 않고 슛을 던진다는 것. 흘려버린 지난 세월에 대해 후회를 거듭하고 바닥난 체력 때문에 팔도 제대로 들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3점슛을 성공시키는 것.

이러한 점이 꾸준히 부각되면서, <슬램덩크>에서 정대만은 강백호를 제외하고 가장 입체감있는 캐릭터가 되는 것 같다.

 

강백호와 서태웅, 윤대협, 신현철, 정우성, 김판석 등등, 사방에 농구 천재가 넘쳐나는 <슬램덩크>의 세계관에서 정대만은 그들만큼의 천재로 대접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불꽃남자', '포기를 모르는 남자', 그리고 강백호의 '정말 좋아합니다'에 필적하는 '농구가 하고 싶어요'까지, 이런 명대사들과 함께 농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것이, 정대만을 <슬램덩크>를 대표하는 캐릭터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대만의 고교 이후는 어땠을까.

작품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농구를 계속했겠지. 어디 실업팀에라도 들어가서 뛰지 않았을까. 체력은 좀 약하지만,  3점 슈터로 이름을 날리면서 살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것을 놓지 않고, 싫어지거나 귀찮아지지 않고, 그렇게 오래오래 좋아하면서, 살았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