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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01708 / 포기] 절념. by 란테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앞길은 말 그대로 깜깜했다. ‘눈 감아봐. 깜깜하지? 그게 니 미래야.‘ 로 대표되는 군대 농담의 그것과 똑같았다. 그나마 그곳은 정해진 시간만 지나면 해결되지만 내 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그때 당시의 난 세상 모든 절망을 혼자 짊어진 채 수렁에 빠져있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아무 것도 노력하질 않으면서 삶의 질적 변화를 바라는, 말 그대로 잉여였다. 바닥인 경제력과 비례해 자존감은 한없이 낮아졌고 우울증 비슷한 증세까지 있었다동생이 아파 병원에 데려가는 날을 제외하면 방바닥에서 의자, 화장실과 냉장고까지가 하루의 이동 경로 전체인 날이 많았다

 

그 와중에 연애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딱 하나 시간 뿐이었지만 상대는 그것을 나와 함께 나누는 것을 무척이나 행복해했다. 하지만 난 상대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했다. 위로도, 위안도, 따스함도, 도움도 받기만 했다. 심지어 내 일상의 답답함을 상대에게 기대는 것으로 풀려 했다. 그동안 그랬듯 이번에도 상대에게 몹시 미안한 짓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상대 덕분에 그나마 덜 망가졌고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주머니 사정, 낮은 자존감, 그리고 바깥 활동.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해결하려면 결국 일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겠다 싶어 뒤늦게 일자리를 구했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 얼굴을 익히고 일을 배우느라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심했을 적엔 두자릿수 더하기도 안 될 정도로 답답했던 머릿속에 낀 무언가가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출근해 회사 밖을 바라보니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었다. 그 안개는 회사와 불과 삼백여미터 떨어진 곳인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었다. 내 시야를 철저히 가린 그 안개를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짙디짙은 안개 속에 서있는 것이 마치 내 앞길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곧, 아예 눈 감은 것처럼 깜깜하진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 억지는 통하지 않았는지 내 얼굴엔 슬쩍 한쪽 입가만 올라간 썩은 미소가 스쳤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동생과 둘이 오래 살아온 것에 비해 너무나도 썰렁한 집에 매달 싸구려지만 가구 하나씩 들여놓는 취미가 생겼다. 집이 집다워지는 기분이 든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들어온 이후 석 달 사이 회사에 들어왔다 나간 사람이 열 명이 넘는 것, 현재 이 회사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 겨우 3년차라는 것, 마케팅 과장과 직원이 오늘 동시에 그만둔 것 등등은 신경쓰지 않고- 거지같이, 병신처럼 살던 날들도 저쪽으로 던져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