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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01707 / 더위] 어느 더운 날의 의식의 흐름 by 에일레스

1.

몇차례 얘기했던 적 있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미스터리, 추리물 같은 것들을 많이 접하면서 자랐다. 엄마가 그런 종류의 책들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집에 그런 책들이 많았던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되겠다. 셜록 홈즈, 미스 마플, 브라운 신부 같은 캐릭터들, 엘러리 퀸, 딘 R. 쿤츠, 배리 우드, 로빈 쿡, 스티븐 킹 등의 작가들을 어렸을 떄부터 쭉 읽으면서 자랐다.

 

 

2.

그렇게 자란 나는 영화의 세계에 빠지게 되면서, 내 취향이 역시나 미스터리나 스릴러 장르 쪽에 많이 특화됐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 감독이 국내는 박찬욱, 국외는 쿠엔틴 타란티노.. 라고 하면 딱 알 수 있겠지. 장르 특성상, 간간이 나오는 잔혹한 묘사에도 꽤 익숙하게 됐다.

한번은 친구를 데리고 영화관에 가서 <킬빌 Vol. 1>과 <올드보이>를 연달아 본 적이 있다. (그 두 영화가 동시대에 상영되다니 정말 영화의 황금기였구나.. 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영화는 두 편 다 내가 골랐고, 내 친구는 그 두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내 친구는 잔인한 장면을 못 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 친구에게 꽤 오래 그 일에 대해서 사과를 해야 했다 ㅎㅎ

 

 

3.

왠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다. 내가 만화 잡지를 한참 보던 시절이니 아마 중고등학교 때로 추정된다. 나는 윙크와 이슈를 꼬박꼬박 사보는 소녀였는데, 아마 거기서 봤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단편 만화였다. 그림체가 어렴풋이 생각나긴 하지만 제목이나 작가 이름은 떠오르지 않는다. 당시에도 유명한 작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용은 이렇다. 어떤 젊은 여자가 며칠동안 꿈에서 반복적으로 어떤 남자를 본다. 여자는 그 남자가 자신의 운명의 상대일까 생각한다. 어느 더운 여름날, 여자는 길을 걷다가 맞은편에서 그 꿈에서 본 남자가 오는 것을 본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남자는 매고 있던 가방 속을 뒤적거린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 남자는 경찰의 취조를 받고 있다. 남자의 대사는 대충 이렇다.

날씨가 더무 더워서, 피를 좀 보면 시원해질까 생각했다. 마침 가방 속에 칼을 사서 넣어둔 것이 있었다고..

그러니까 남자가 칼로 여자를 찔러 죽인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더워서 그랬다는 걸 이유로 친다면 그게 이유겠지.

거의 20년쯤 전에 본 것인데도, 나는 왠지 모르게 아직까지 이 만화를 기억하고 있다.

아니지. 왠지 모르게-가 아니다. 

왜겠는가.

그 만화의 그런 설정들이 내 취향이었던 것이다.

 

 

4.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이 있다. 그 중에 나처럼 미스터리나 스릴러 좋아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엄청나게 많다. 그런 취향들이 모이고 묘사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예술이라는 카테고리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예술의 세계에서는 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게 보통이다. 꽃이라던가, 동물이라던가, 아름다운 인체라던가, 이런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도 있지만 에이리언 캐릭터를 그려낸 것으로 유명한 H.R.기거의 작품이라던가 독창적인 판타지 세계를 창조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과 같은,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도 존재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아주 잔혹하게 죽음을 맞지만 그것은 예술 작품의 한 부분으로서 받아들여진다. 아무도 타란티노가 작품 속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거나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5.

그래서, 평소에 고어물을 좋아했고 추리나 스릴러 소설을 좋아했다는, SNS의 자캐 커뮤에서 활동했다는, 그림을 잘 그렸다는,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의 범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마음이 불편했다. 고어물을 좋아하고 추리나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고, 자캐 커뮤 등등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창작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범죄랑은 상관없는 삶을 산단 말이지.

그냥 그 범인이 나쁜 인간인 것이다.

 

 

6.

드라마 <비밀의 숲>의 마지막회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는, 뇌물 수수와 미성년자 성접대를 받은 혐의로 법정에 선 경찰서장 김우균이 자신의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사과하는 장면이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보호 본능이 있고, 그것은 신체적인 것 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일 것이다. 자신에 대해 비난이 일면 그것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겠지. 자신의 죄를 알고, 그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생각할 줄 알고, 달게 벌을 받겠다는 모습을 현실에서는 거의 못 본 것 같다. 그래서 드라마 속 저 장면이 더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르겠다.

 

 

7.

조윤선이 집행유예 받는 이 세상에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한다.

잘못한 사람은, 죄값을 제대로 치렀으면 좋겠다.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