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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01707 / 더위] A Midsummer Night's Dream by 김교주

A Midsummer Night's Dream

 

비행기가 랜딩기어를 내리고 서서히 속도를 줄여나가다가 마침내 활주로에 내려앉는 그 순간, 그 때에 보통 나는 여행지에서 꾸던 달콤한 꿈에서 깬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는 걸 그만큼 잔인하게 설명해주는 때는 없다.

제주를 떠난 비행기가 채 한 시간에 못 미치는 비행을 마치고 김포에 도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된 이번 여행 끝무렵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고, 나는 공항철도 입구에서 어색하게 너와 작별했다. 여전히 얼마쯤 내 정신을 제주 어딘가에 두고 온 채였다. 어쩌면 이미, 제주 공항에서 깨었어야 하는 꿈이었다.

 

돌아왔을 때의 공허를 각오하고 떠났어야 하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너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여행 첫날 밤, 하나뿐인 침대를 내게 온전히 내주고 바닥에 샤워타올을 깔고 잠든 너를 보았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게스트 하우스의 통유리를 지난 햇살을 커텐이 미처 다 막지 못하고 희미하게 방을 비추는 가운데 여전히 바닥에서 웅크린 모양 그대로 고른 숨을 내뱉는 너를 보았기 때문에. 부시럭대는 내 소리에 잠을 깨어 수건이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끌어안고서는 잠깐만 누나 옆에서 자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네 표정엔 어떤 설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마음의 준비를 했어야 마땅하다는  잔인한 현실을 몰랐다. 침대 한 끝편에 올라와 누워서도 너는 그저 아이처럼 잠들었었다. 허리가 아팠다고 구시렁대면서.

게스트 하우스 주인장이 마련해준 더할나위 없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서 우리는 다시 침대에 틀어박혔다네가 놓쳤다던 히어로물의 마지막 시리즈가 TV에서 방영되고 있어서라는 그럴 듯한 핑계와 함께 외출하려던 옷차림 그대로 영화에 사로잡혀 있다가 문득 네가 팔을 내밀어 내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나는 이미 다섯 번 넘게 본 영화를 굳이 다시 보다가 혼곤한 잠에 빠져 들었다선잠이 들어 몽롱했던 가운데 기억나는 건 이런 거다. 내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맞추던 너와, 편해요? 하며 팔베개를 고쳐주던 너와, 잘 때가 제일 예쁘네요, 하고 웃던 너. 더 자요 더, 하고 내 등을 토닥이던 너와, 흩어진 머리칼을 단정히 넘겨주며 눈꺼풀에, 코에, 뺨에 다시 입맞추던 너, , 마침내 내 입술에 와 닿던 네 뜨거운 입술 같은 거.

네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는 걸, 네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는 걸, 내 날숨에 너의 정신은 온전히 깨어 있었다는 걸 알았다. 얕은 신음소리를 내뱉는 네게 물었었다. , 왜에? 좋아서요, 너는 다시 한숨처럼 대답했었다. 그날 우리는 침대에서만 대낮을 다 보냈다. 포근함이 주는 안온한 죄책감이 나를 휘감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견딜 수 있다고 믿을만큼 나는 아주 적절하게 바보였다침대에 열 여섯 시간을 누워 있어도 아무도 잔소리하지 않는 하루, 깨고 싶을 때 깨고, 먹고 싶을 때 먹고, 걷고 싶을 때 걷다가 갑자기 쏟아져 내린 잠깐의 소나기를 홀딱 맞으며 바다를 헤집고, 마침내 다시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 샤워까지 마치고선 도로 침대에 들어가서 우리는 이번엔 둘 다 뜨거웠다. 너는 내 품을 파고 들었고 나는 그런 너를 밀어낼 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거추장스러운 일상의 옷을 모두 벗어던진 내게 너는 그랬다. 아기가 되었네요.

여행객이 아닌 것처럼, 제주의 사람들이 자주 간다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선 맛있는 식사에 한껏 행복해진 나를 보면서 너는 나보다 더 기꺼워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돌아갈 날이 가까웠으니 남은 시간 동안 조금 더 죄책감에 시달려도 좋다 싶었다. 국립 박물관에 꼭 가야한다는 내 고집을 너는 웃으면서 받아주었고, 상설 전시관의 탐라 순력도 앞에서 두 시간을 쓰면서 우리는 나사 빠진 애들처럼 낄낄댔다. 공항에 가까운 곳으로 잡은 두번째 숙소의 침대는 킹사이즈 두 개였고, 마침내 필요한 만큼 정신이 되돌아온 내가 던져준 베개를 받아 안은 너는 애처럼 칭얼대며 내 옆에 뛰어들어 어리광을 부렸다. 졸려요, 재워줘요.

돌아오던 날 찾아간 추사 기념관 앞의 흔들그네에 나란히 앉아서 낮은 돌담 너머로 복원된 김정희의 유배지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비행기 출발 시각을 놓칠 뻔 했었다. 너는, 그 때 너는 제주 공항 입구에서 그랬다. 우리가 타야 할 비행기는 벌써 30분 지연됐어요. 앞으로 제주에 올 때는 태풍에 맞춰서 와요. 그래야 돌아가지 않을 핑계가 생기잖아요.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너한테 그렇게 대답했다. “Okay, if we have the next chance.”

비행기의 창가 자리를 네게 내주고 내가 조금씩 현실로 돌아오고 있을 때쯤, 너는 새하얀 구름이 한없이 펼쳐진 창밖을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알러지 때문에 팔을 긁어대는 내 손을 꾹 눌러 잡고, 그러지 마요, 하지 마, 하고 중얼거리면서.

 

착륙하겠다는 기장의 안내와 함께 비행기가 서서히 속력을 줄여나가다가 마침내 활주로에 내려앉았을 때, 김포 공항에는 하늘이 찢어진 것처럼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꿈에서 모두 깨기에 비행은 턱없이 짧았다. 공항 철도 앞에서 너와 어색하게 이별하고, 한참이 걸려서야 겨우 내 방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화장대에 빼두고 간 커플링을 제 자리인 왼손 약지에 끼고 싱글 침대 한켠에 필수품인 양 굴러다니는 봉제 인형을 끌어안고서 못 다 깬 꿈 때문에 깊게 한숨을 뱉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 자기야. , . 나도 보고 싶었어."

 

어쩌면 이미, 제주 공항에서 다 깨고 왔어야 할, 꿈이었다.

 

 

제주 여행 기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