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0년

[201005 / 비] 비의 노래. by 란테곰

일곱 살의 어느 여름날, 처음으로 물난리를 겪은 철없는 소년에게 비는 ‘좋아하는 친척 형네서 오랫동안 즐겁게 놀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는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무려 패밀리도 있고, 평소 아버님의 반대로 인해 제대로 읽지도 못했던 드라곤의 비밀 - 드래곤 볼 해적판. 이름이 무색하게 책의 1/3만 드래곤 볼이고 나머지는 잡다한 만화로 채운, 학교 앞 문방구 뽑기의 당첨 품목으로 유명했던 책. 스토리는 나메크 성에 갓 도착한 지구인들의 무력함에 대해 슬퍼할 시기. - 이 책장에 한가득 꽂혀 있는 멋진 친척형네 집에서 오랫동안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제겐 상추를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작업 보조’ 의 역할에서 벗어나 환타스틱한 여름방학을 보내게끔 도와주는 구세주였지요. 비가 그친지 사흘이 지나서야, 아홉시 뉴스에서 헬기로 촬영한 우리 동네의 전경을 통해 비닐하우스로 된 우리 집의 꼭대기에 개 한 마리가 덩그러니 앉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나 집 자체가 떠내려가진 않았을까 걱정한 것이 기우였던 것도, 아버님이 평소 무척이나 아끼시던 곰 - 곰이라고 불렀지만 갭니다. - 의 무사함도 확인할 수 있어서 그저 마냥 기쁘기만 했던 일곱 살. 약간의 가재도구라도 꺼내보고자 튜브 보트를 저어 시뻘건 흙물 위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부럽다며, 내년에 홍수나면 꼭 튜브 보트를 챙겨야겠다며 웃으며 얘기했다가 심하게 낙천적인 녀석으로 매듭지어져 부모님과 일가친척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뻔 했던 화려한 전적을 갖고 있던 일곱 살. 그 아이에게 있어 비는 ‘온 친척이 모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 였습니다.

 

나이를 먹어 열일곱 살의 초여름, 그 날도 비가 몹시 많이 내렸습니다. 실기가 있던 삼교시의 음악 수업, 담임선생님의 수업이라 잔뜩 긴장에 노래를 불렀는지 뭐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고, 어찌어찌 수업을 끝내고 올라가는 길에 담임선생님이 저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아까 실기 점수를 A라고 하셨는지 B라고 하셨는지 잘 못 들었는데 여쭤봐야지’ 라며 찾아간 담임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1교시 끝나기 전에 연락이 왔는데, 중요한 실기 시험이니 이걸 잘 해서 갈 수 있게 하고 싶어 아버님께 양해를 구했으니, 네게 늦게 전한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며 서둘러 가방을 챙겨 병원으로 가라는 말을 전해주셨습니다. 두 달 전부터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손에 들려주신 우산도 펼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이십 분을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한 시간 후 버스에서 내려 다시 십 분을 걸어 찾아간 병원에서 지난 두 달 간 도통 볼 수 없었던 어머님의 평안한 모습을 볼 때까지 눈물을 쏟았던 열일곱 살. 그 아이에게 있어 비는 ‘온 친척이 모두 모여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위로하는 시간을 갖는 것조차 방해하는 짜증나는 존재’ 였습니다.

 

나이를 더 먹어 스물일곱 살의 여름. 두 번의 큰 수술과 3주간 중환자실에서 의식 불명 등 총 두 달 보름동안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동생이 퇴원해 집에 돌아온 다음 날, 전날까지 쨍쨍했던 하늘에서 시원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하는 동생에게 에어컨이 없는 집이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을 생각하면 참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지요. 두 달 동안 제대로 쓰질 못해 약해지고 굳어버린 발목 관절에 힘을 넣어주기 위해 스트레칭을 해주며 수다를 한바탕 떨고 나서,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고 담배 하나를 꼬나물고 멍하니 창밖을 보다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스물일곱 살의 내게 있어 비는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내 피붙이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존재’ 라는 것을요. 그리고 지난 20년간 십년 주기로 세 번 들은 비에 대한 생각을, 단순한 나열을 통한 우연으로 정리할 것이 아니라 ‘비가 제게 들려주고자 마음먹은 것이었다는 것’이라 생각하자고 정했습니다. 오랜만의 술자리에서 처음으로 들이키는 소주 한 잔이 그 날 그 날에 따라 가끔은 쓰고 가끔은 달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늘 쓰지만은 않고 늘 달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쓰든 달든 마시게 되어있다면, 이왕 마셔야 할 것 즐기는 마음으로 마시자는 마인드를 가지겠다는 말씀이지요.

 

서른일곱, 마흔일곱, 쉰일곱... 언제까지 계속 될 진 모르겠지만 일단 칠년 후, 제가 듣게 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느 쪽이든, 귀를 잔뜩 기울이고 놓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비의 노래와의 십년만의 재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