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0년

[201004 / 길] 열심히 걸으라고 하지 않을테니 무너지지는 말아. by 김교주

통영, 충무. 출생의 어두운 기억을 가진 김약국(이라고 불리는 약방 주인이자 어장주)이 있고 그에게는 다섯 명의 딸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이란 비정하고 잔인한 세월과 세상의 풍파 앞에 찢기고 구르며 넝마가 되고, 차갑고 푸른 통영 바다는 말없이 자리를 지킬 뿐 어떤 위로도 먼저 건네지는 않습니다.

다섯 딸에게는 저마다의 삶이 주어져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그 삶을 항해해 나갑니다. 나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욕심을 차리리 급급한 용숙과, 총명하고 당당한 용빈,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용란과 수더분한 용옥, 그리고 막내 용혜. 

이 다섯 딸의 삶은, 그야말로 기구하고 처절합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박복한 것일까 읽는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만드는, 그런 인생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처참한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인 김약국마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다섯 자매는 자신들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을 모두 잃게 됩니다. 이제는 정말 그들만의 힘으로 홀로, 걸어가게 된 것이라고 하면 좋을까요.

김약국의 딸들(나남창작선 29)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경리 (나남, 1993년)
상세보기

산다는 것은.......
그것이 해로든 육로든 간에 주어진 길을 헤쳐 나가는 과정입니다. 백 명의 사람에게는 백 명의 길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출발점과 도착지가 완벽히 같은 길을 가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우리 개개인에게 달려있습니다.

어제 밤, 친구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폐암으로 투병중이시던 아버지의 부고를 전하며 친구는 담담하더군요. 울먹이는 저를 도리어 위로하고, 정말 바보처럼 괜찮냐는 말밖에 못하는 제게 괜찮은 것 같다며 꿋꿋하게 대답하는 친구에게 해줄 말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깊은 밤을 뒤척이며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이 책을 떠올렸습니다. 그녀의 삶과 저의 삶, 그리고 책 속 딸들의 삶들이 겹치며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골라두었던 옷들 대신 까만 색 정장을 꺼내 입었습니다. 아침, 거울 앞에 서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타이를 세 번이나 고쳐 맸습니다. 꽤 오래도록, 타이를 매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나 자신을 다독이면서 터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간신히 누르며 출근하는 길에 아이팟 클래식에서는 하필이면 이승환의 '남편'이 흘러나오더군요. 탄식에 탄식을 더하며 생각했습니다.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이라면 왜 이렇게 힘겨워야만 하는 것일까.

어제 밤 친구는 언제 어디서나 끝끝내 자기 편이 되어주던 사람을 잃었습니다. 길지 짧을지는 알 수 없지만 외로운 것임에는 분명할 삶이라는 길에서 자신을 이끌어주던 사람의 손을 하나, 놓쳤습니다. 그러나 제 친구가 간밤 제게 보여주었던 그 씩씩함과 굳건함으로 자신의 길을 다시금 걸어나갈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힘겨울 그녀에게 애써 열심히 걸으라 말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외롭고 힘들겠지만 옆에서 지켜볼 테니 그저 무너지지는 말아달라고만 부탁할 생각입니다. 만일, 제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주어진다면, 말입니다.

4월은 정녕, 잔인한 달이 맞나봅니다.





이 부족하고 어줍잖은 글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내 친구 숙이와 영면에 드신 그녀의 아버지께, 그리고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바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