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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01101 / 망각]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니까. by 에일레스


살다보면 가끔 억울한(?) 순간이 있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어쩌다보니 내가 잘못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어있는 경우가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거냐 하면-

나는 본의아니게(?) 친했던 친구와 인연을 끊은 일이 두번 있다. 물론 결정 자체는 내가 한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결정을 하게끔 만든 것은 두번 다 상대방이었다.(라고 나는 주장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런거다.

그 두번 중 하나는, 같이 수업듣던 친구였다. 어느날 수업에 안들어오길래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조금 걱정하다가 같이 수업듣던 (그리고 그날 늦게와서 수업에 역시 안들어왔었던) 후배에게 얘기했더니, 그 후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어? XX언니 전화번호 바뀌었다고 문자왔던데. 언니는 연락 못받았어?"

다른 한번의 경우도 조금 비슷하다. 다른 친구의 생일을 앞두고, 생일 선물 준비 때문에 연락을 꼭 해야하는 상황인데 연락이 되지 않았다. 거의 일주일을 그랬다. 진짜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걱정을 했었다. 이 경우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전화도 하고, 문자도 보내고, 메신저에서도 기다렸다.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러다 5일쯤 되던 날 들어가본 그 친구의 미니홈피에서, 그 친구가 자신이 아는 동생 싸이에는 불과 하루 전 글을 남기고 아무렇지 않게 연락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 그들은 왜 나와의 연락을 끊었는가?
첫번째 경우의 그 여자아이는 그때 알수없는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피해망상'이라는 단어는 그때 당시에 그 아이가 직접 사용한 말이다.) 뭐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대상이 나였던 것 같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아무 짓도 안했다.) 두번째 경우의 그 남자아이는 나중에 얼핏 듣기론 여자친구랑 헤어져서 그랬댄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그들로부터 '내쳐짐'을 당했다고 간주했다. 그러면 나 역시 더이상 그들을 '끼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다짐'했다. 나는 주변의 다른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설명했다.
이게 말이 쉽지,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특히 두번째 경우에는 정말 친했던 친구였기 때문에 더 충격이 컸다. 거의 한달 정도를 혼자 우울해했다. 내가 잘못 살았나 하는 괴로움 때문에. 내가 그러고 있던 동안에도 그 친구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주변인들 기억 속에서 내가 '왜' 그랬는지가 희미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내 친구들은 결과만을 기억한다. 내가 그들에게 '뭔가' 화가 나서 그들을 더이상 안 본다-는 결과, 딱 그것. 심지어는 '내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고까지 기억한다. (아니 뭘 사과를 해야 용서를 하지 -_-)
얼마 전 한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또 그들 얘기가 나오길래 내가 물어봤었다.
"너네는 내가 왜 그랬는지도 기억 못하잖아. 그냥 내가 걔한테 화내고 걔 안본다고 그런다는 거 하나만 알지."
친구가 대답했다.
"그치. 내 일도 기억 못하는데 그런걸 어떻게 기억하냐."

그렇다. 기억하는 것은 나 뿐이다.


2011년 첫번째 '망각'이라는 주제를 받고 생각난 영화는 스티븐 킹 원작을 테일러 헥포드가 연출한 <돌로레스 클레이본> 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다시 한번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앞의 저 긴 서론이 나오게 되었다.

돌로레스 클레이본
감독 테일러 핵포드 (1995 / 미국)
출연 캐시 베이츠,제니퍼 제이슨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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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질적이고 냉철한 여기자 셀리나(제니퍼 제이슨 리)는 엄마인 돌로레스(캐시 베이츠)가 살인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5년만에 고향마을로 돌아온다. 돌로레스는 가정부로 일하던 집의 주인인 베라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고, 이 사건에 돌로레스의 유죄를 확신하는 늙은 형사 매키(크리스토퍼 플러머)가 매달리고 있었다. 매키는 86건의 살인사건을 맡았는데 유일하게 해결하지 못한 단 한건이 바로 과거에 돌로레스가 남편(즉 셀리나의 아빠) 조를 죽였다는 혐의를 뒀던 사건이었다. 미궁으로 빠진 그 사건을 두고 매키와 셀리나는 돌로레스가 죽인 것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다. 

진실은 이랬다. 돌로레스의 남편 조는 무능력하고 무식하고 폭력적인 주정뱅이였고, 어린 딸 셀리나를 성추행까지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돌로레스는 그동안 베라의 집에서 일하며 모아둔 돈으로 셀리나와 떠날 계획을 세우지만, 조가 그 돈마저 빼돌린 상태라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 이때 돌로레스에게 베라가 충고한다.
"때로는 악녀가 되는 것이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이야."
그리하여 개기일식이 있던 날, 술에 취한 조는 돌로레스를 쫓다가 낡은 우물에 떨어져 실족사한다.

그런데 셀리나는, 이러한 기억 자체를 모두 잊고 있었다.

 

셀리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빠의 추행에 대한 기억을 못하는 상태였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끔찍한 기억을, 어떻게 지울 수가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셀리나는 아빠가 자신을 성추행했던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로 인한 아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을 수도 있다. 덕분에 모든 증오심은 아직 살아있는 엄마 돌로레스에게 쏟아부은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현실도피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사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근작인 <셔터아일랜드>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꼭 이렇게 거창한 사건이 아니긴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 친구들의 심리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와는 상관없이, 내 친구들은 그들과의 관계를 지속해야 하니까, 그들이 직접적으로 자신들에게 잘못한 것은 아니니까, 그냥 잊어버릴거 잊어버리고 예전처럼 편하게 친하게 잘 지내면 되지 뭐..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래야 그들을 대할 때 마음이 편할 테니까.

물론, 내 친구들 입장에서는 진짜 별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특별히 기억해야되는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내가 지나치게 세세하게 오만가지를 다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앞에 말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는 조금 더 이롭지 않겠는가. 허허.


예전에 쓴 글에서 나는 사람들이 과거를 무조건 예쁘게 포장해서 추억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건 그 사람들이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기억의 주체는 인간 개개인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은 사실만 선택해서 머릿속에 남겨두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은 같은 사건을 놓고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게 기억하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그 영화에서 뭐가 진실이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각각의 기억에 따른 입장 차이를 보여줄 뿐이다.
어쩌면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누가 맞는지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나는 내가 아는 것들을 잘 기억하고 살면 된다.

그게 최선이 맞을거다.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