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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01101 / 망각] 묻으려는 자를 위해. by 란테곰

흔히들 사람을 망각의 동물이라 칭합니다. 도와주기로 약속했던 일을, 어제 열심히 연습했던 노래의 코드 진행을, 밥을 같이 먹기로 말했던 것 등등, 본의 아니게 잊게 되는 많은 일들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이처럼 사람에겐 그닥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잊을 수 있는 일들이 있지만, 한편으론 또 사람이기에 때론 기어코 잊어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에다 시간이라는 만병통치약을 더하기까지 해가며 몸부림을 쳐도 결코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일도 있기 마련입니다. 가슴이 터져버릴 정도로 행복했던 기억이 그렇고, 큰 사고의 경험이 그렇고, 아끼던 물건을 실수로 망가뜨린 것 등등도 그렇겠지만. 아끼던 사람을 잃은 것, 그것만큼 사람을 죽도록 힘들게 하는 일은 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망각의 동물인 사람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은 존재하고, 그 절대치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아끼는 사람이기 때문에.

서른이 넘자, 늘어나는 것은 여기저기에서 날아오는 결혼식 청첩장, 그리고 그만큼 늘어난 돌잔치 초대장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놀러 가면 항상 맛난 밥을 양껏 담아주시던 친구의 어머님, 고등학교 다니느라 고생했으니 시원하게 한 잔 하라며 맥주를 가득 따라주시던 친구 아버님의 부고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굴건을 한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친구를 그저 다독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안타까운 그런 날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사십 구제가 끝나고 겨우 만난 친구의 퀭한 눈을 모른 척 하며 함께 소주 한 잔을 털어넘기는 일 역시 조금씩 늘어갑니다.

죽도록 힘든 경우에 처한 친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힘내라는 말 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경험이 있는 저도 다른 말을 도통 떠오르질 않아 힘내라. 힘내서 다시 걸어가라. 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되더라구요. 왜냐하면, 제가 같은 일을 겪었던 그 때 다른 말은 귀에 제대로 들리지도, 가슴에 남지도 않았지만 힘내라는 말은 유독 제 귀에 남고 가슴에 남아 큰 힘이 되어주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 말만큼 위로와 격려, 그리고 걱정이 적절하게 섞인 말이 없었고 또 그 말만큼 제 가슴 속에 가감없이 전해진 말이 없었기에, 그 날의 술자리에서만큼은 친구를 위해 기꺼이 앵무새가 되었습니다. 제 말은 그 친구의 가슴에 남았을까요. 시간이 조금 지나 친구가 다시금 삶에 충실해질 수 있을 정도로 상처가 아물었을 때, 그 날의 내 말이 조금이마나 도움이 되었을지 한 번쯤 물어보고 싶습니다.

 

작년, TV 프로그램에 나온 김국진씨는 미션으로 임했던 대학 강의에서 ‘시간은 모든 것은 소멸시킨다’ 는 표현을 빌어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은 완전한 별개임을 선언함으로써 따뜻하고 포근한 과거의 기억에 휘둘리는 것은 지금의 자신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청중에게 말하고자 했었습니다. 저는 그 강연에서,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를 이미 지난 일로 인정하고 담담히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가 거친 수많은 고민과 좌절, 난관과 시행착오를 엿볼 수 있었고, 결국 그 많은 어려움을 헤치고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빗대어 무언가를 전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시간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분명 시간이라는 만병통치약은 아무리 커다란 마음의 상처도 결국 떨쳐낼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죽을 만큼 아프고 힘든 와중에도 어떻게든 살아갈 의지를 가진 이에게만 슬쩍 손을 내밀 뿐, 다시 일어나길 포기하고 멈춘 사람을 억지로 붙들고 일으켜주진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만병통치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포지션에서 당신을 지켜볼 뿐, 그 시간의 도움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일어서려는 노력이 아닐까 합니다.

기쁨이나 환희, 때로는 고독이나 슬픔, 절망. 가끔의 여유로움 등등 많은 것을 짊어지고 오늘 하루를 이겨낸 우리 모두는 다시금 내일을 향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생각합니다. 최근에 겪은 슬픈 일로 힘들어하는 친구가 상처를 잘 추스리며 내일 하루 또다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길 바라며 글을 줄입니다. 잊어야 할 것과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의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게 되는 것 또한 우리, 사람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