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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01101 / 망각] 잊어? 그걸 어떻게 잊어? by 김교주

*2011년은 제게 박완서 선생의 해가 될 예정입니다. 김교주의 2011년 팀블로그 포스팅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대아직도꿈꾸고있는가(박완서소설전집15)
카테고리 소설 > 테마소설 > 드라마/영화소설
지은이 박완서 (세계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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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음. 사실 이 책의 줄거리를 곰곰 되짚어 보면 요즘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의 소재로 쓰이기에 더 없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신파고, 나쁘게 말하면 막장이 되는 거라고 누군가는 진저리를 치더군요. 그러나 박완서 선생과 선생의 글은 (감히 말하건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문경은 이혼녀입니다. 아내와 사별한 첫사랑 혁주를 만나 두 사람은 재혼의 꿈을 키우지만 혁주는 무참히 문경을 밟고 보다 좋은 조건의 여자와 결혼해버립니다. 대신 문경의 태중에는 혁주의 아들이 남죠. 교사였던 문경은 非혼모를 향한 세상의 부당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에서 고립됩니다. 생물학적 아버지인 혁주의 도움을 받고자 하지만 혁주는 철저히 그녀와 그녀의(사실은 그 역시 책임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아들을 외면합니다. 
힘겹게, 그러나 끝내 당당히 자신의 살 길을 찾아낸 문경과 아이 앞에 또 하나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혁주의 새 아내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인데요. 

여기까지만 봐도 이 소설은 충분히 신파 맞습니다. 이 이후의 전개에 이르면 말할 것도 없지요. 이쯤에서 이 작품에 대한 변론을 조금 해두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의 흐름은 자극적인 사건을 터뜨려 독자를 미혹시키는 데에 방점을 찍지 않습니다. 사건들은 물론 자극적이고, 통속적이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은 사회에 대한 냉소이고, 인간 본성에 대한 조소거든요. 

혹여 아직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이 아래의 부분을 스킵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이 책의 결말이 공개될 예정이니까요.




아마 문경은 잊지 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만 잊었다고, 지웠다고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때로 많은 것을 잊고 삽니다.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망각이라는 말은 얼핏 모순인 듯 싶지만 실제로는 더할나위 없이 우리의 인생에 들어맞습니다. 잊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나갈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는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잊지 않았다면, 잊었다고 기만이라도 해야 할 일들. 다시 마주쳤을 때 조우해야만 하는 그 뜻하지 않은 상처와 아픔들 때문에 가끔은 일부러라도 망각을 빚어내는 나약한 인간으로 살기가 요즘은 조금 힘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문경에게도 그런 혐의를 뒤집어 씌워 보는 겁니다. 당신, 잊고 있었어? 그걸 어떻게 잊어? 그럴 리가 없잖아.




이 글을 쓰던 와중에 박완서 선생의 별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제 10대 후반에서부터 오늘까지의 독서세계를 관통하는 분이셨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여성의 삶을 관조하고 전후 세대의 아픔을 어루만지던 대가. 2011년 한 해를 이 분의 글과 함께 보내리라 결심했던터라 더 마음이 스산해집니다. .... 영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