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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01010 / 가을] 가을을 타고 왔다 간 사랑 by 에일레스

사람들은 흔히 과거를 미화해서 기억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추억이라고 부른다. 과거에 겪은 어떠한 나쁜 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추억으로 남는다고 한다. 죽을만큼 힘들었던 일도, 아팠던 일도, 화나고 억울했던 일도, 지나고 나서 보면 다 웃으며 떠올리는 일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과거의 기억을 그리는 영화들도 대부분 아름답게 그려진다. 사건 자체는 더럽고 추악할지라도, 그 때의 하늘은 아름다웠고 그때의 바람은 향기로웠고 그때의 우리들은 참 해맑았다.. 뭐 그런 식이다. 대표적인 예로 곽경택 감독의 <친구>를 생각하면 되겠다.

내가 <말죽거리 잔혹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그런 시각에서 한발짝 떨어져있는 느낌이어서 그런 것 같다. 제목에도 포함되어 있듯, 이 영화는 지나간 과거의 '잔혹'했던 개인사를 담담하게 그린다.


말죽거리 잔혹사
감독 유하 (2004 / 한국)
출연 권상우,이정진,한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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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주인공 현수(권상우)가 정문고로 전학을 오면서 시작된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현수의 주변 환경은 매우 마초적이다.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현수의 아버지(천호진)도 그렇고, 그가 반에서 친해진 학교 짱 우식(이정진)과 햄버거(박효준)를 비롯한 남자 고등학교의 풍경도 말할 것 없이 그렇다. 그리고 현수의 우상은 절권도의 창시자 이소룡이다.

한편, 현수는 매우 섬세한 캐릭터다. 그는 라디오를 즐겨 듣고, 팝송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보낼 사연 엽서에 말린 꽃을 붙여 보낼 줄 아는 소년이다. 그가 겪는 사랑 이야기가 <말죽거리 잔혹사>의 또다른 한 줄기를 형성한다.

현수는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옆학교 여학생인 은주(한가인)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렇지만 역시 은주를 마음에 둔 우식의 적극적인 대쉬로 인해 말 한마디 못하고 우식과 은주가 사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다. 우식과 은주가 헤어진 후에도 현수는 힘들어하는 은주를 옆에서 보기만 해야 한다. 그러다 그가 라디오에 보낸 사연에 은주가 답을 하게 되고, 현수는 용기를 내어 은주에게 기차 여행을 제안한다.



현수와 은주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현수는 은주에게 약속했던 기타 연주를 들려주며 노래를 하는데, 그 노래가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 이라는 것은 조금 의미심장한 복선.



그리고 마침내 현수는 은주와 입맞춤을 한다.
그걸로 현수의 은주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 끝인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영화는 또 다른 반전을 가져온다. 학교에서 선도부장 종훈(이종혁)과의 싸움에서 패한 우식이 가출을 했는데, 옆학교 여학생이 같이 나갔다는 거다.
은주였다.



비 오는 날, 현수는 비를 맞으며 은주의 집 앞으로 온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은주야.. 은주야.."
부르는 소리는 점점 커져도, 그녀는 그 곳에 없다. 현수의 눈물처럼 세찬 비가 내린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결국 은주와 현수를 이루어지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수가 한풀이하듯 펼치는 종훈과의 처절한 싸움은 승리를 가져오되 그의 인생에 퇴학이라는 오점 역시 남긴다. 그에게 있어 1978년 가을은 잊을 수 없는 계절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이 영화에서 권상우는 섬세하고 다정한 현수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물론 액션신 역시 보여주긴 하지만- 
그의 최대 히트작이 그가 순정파로 나왔던 <천국의 계단>이라는 점을 생각해 봤을 때, 권상우에게는 사실 남자답고 강한 역할보다는 이런 부드럽고 섬세한 역할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권상우씨, 이제 노선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