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0년

[201010 / 가을] 秋露. by 란테곰

가을이 오면 눈부신 아침 햇살에 그대의 미소가 아름다워요.


버스를 기다리며 터미널에 앉아 있노라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 한 마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 문득 그대의 미소가 아름다웠는지를 떠올려보았지만 영 가물가물했다. 왜 그리 가물가물한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그대’라고 부를 사람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기에 가물가물할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눈부신 아침 햇살에 그대의 미소가 아름다운지를 확인하려면 같이 살아보든가 적어도 같은 침대를 한 번쯤 써 봤어야 확인이 가능한 거 아니냐며, 그런 사람이 있으면 굳이 가을뿐만이 아니라 사시사철 언제 봐도 아름답지 않겠냐며 혼잣말로 이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 올랐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버스 안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월이지만 햇살이 조금 따가웠다. 바깥 경치를 즐기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결국 커튼을 쳐버리고는 의자를 한껏 뒤로 젖혔다. 경치도 보지 못하면서 멀뚱멀뚱 앉아있을 바엔 차라리 잠을 자는 편이 훨씬 나을테니까. 머릿속이 복잡해 전날 뜬눈으로 밤을 보냈기에 잠이 마구 쏟아졌다. 보나마나 또 코를 드렁드렁 골겠지만 버스에 탄 사람도 많지 않았고 그나마도 띄엄띄엄 앉았으니 코골이로 인한 피해가 크진 않으리라, 또 코골이 때문에 낯부끄러운 것도 크진 않으리라 지레짐작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래도 내심 불안한 마음에 ‘코를 안 골면서 잔다’ 며 영 쓸모없는 마인드 컨트롤을 챙기긴 했다.


깨어보니 버스는 터미널로 들어서고 있었다. 타이밍 맞춰 잘 깼구나하며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내렸다. 기사님께 ‘고맙습니다’ 인사하니 ‘이야, 총각. 내가 버스 운전만 15년을 했는데 당신처럼 코 고는 사람은 생전 처음이다’ 라며 혀를 내두르시는데, 역시 마인드 컨트롤은 쓸모가 없었구나라는 헛생각을 했더랬다. 참말로 수술을 하긴 해야겠단 생각도 함께 했다.


담배 하나를 빼어 물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서 자신의 크기를 뽐내듯 놓여진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그 깊은 파랑이 내 눈을 잡아끌고는 도저히 놓아줄 생각을 하질 않았다. 계속 보고 있자니 눈이 시려 슬쩍 소매로 눈가를 한 번 비비고는 터미널 입구에 줄지어 서 있던 택시 중 맨 앞에 있던 택시를 잡아탔다. 주소지를 기준으로 뽑아놓은 지도를 건넸더니 ‘아이구, 이렇게 인적 뜸한 곳을 가시게?’ 라 기사님이 물으셨고, 난 그저 싱긋 웃기만 하고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시골길을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차마 산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자그마한 언덕의 중턱. 산꼭대기에 절이 하나 있긴 했지만 버스가 다닐만한 길은 아니었고, 주위에 인적도 거의 없었다. 기사님께 콜택시 번호를 물으니 와 본 사람이 데리러 오는 것이 빠르니 자신이 오겠노라며 직접 핸드폰 번호를 적어 건네주셨더랬다. 고맙게 받아놓고선 택시를 보내고, 닦여진 길 옆, 수풀 우거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론 춥지만 낮엔 따뜻했기에 산을 타자니 절로 땀이 흘렀다.


한참을 둘러보다 겨우 나무에 표식으로 달아놓은 허리띠를 발견했다. 이젠 땅으로 스며들었을 아버님의 목을 축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가방에서 주섬주섬 소주 한 병을 꺼내며 나무로 다가가 나무 주변에 뿌렸다. 이슬에 젖었는지 살짝 눅눅해진 낙엽을 자리 삼아 절을 두 번 올리고는 나무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 내년엔 여기가 골프장이 된대요. 이제 아버지를 뵈려면 어디로 가야 좋을지를 모르겠어요. 이게 다 너무 일찍 가신 탓 아닙니까. 무어가 그리 급하셔서 납골당 하나도 못 해 드릴 적에 가셨답니까. 그저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를 뵙고 싶은 마음만 있으셨나요. ...동생이 많이 아파요. 수술을 해야 된다는데, 위험한 수술이라 어떻게 될지 확답을 할 수가 없다더라구요. 동생까지 데려가시면 정말 미워할거에요. 꼭, 꼭 도와주세요. ...아참, 그러고보니...




오래오래 묵혀뒀던 얘기들을 보고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해질 무렵이었다. 시큰해진 코를 훌쩍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절 두 번을 올리고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겨우 아까 택시를 타고 왔던 길을 찾아 기사아저씨에게 받은 전화번호를 뒤적이다 바라본 하늘은 아까의 파랑은 온데간데없이 온통 노랗고 빨갛게 수놓아져있었다.


계속 보고 있자니 눈이 시려 슬쩍 소매로 눈가를 한 번 비볐다. 그러나 노랗고 빨갛게 수놓아진 하늘은 여전히 초점이 잔뜩 흐려진 채로 있었기에, 난 몇 번이고 소매로 눈가를 비벼야 했다. 하늘의 노랗고 빨간 색이 내 눈가에도 수놓아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