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출판사에서 2000년 8월에 발간된 이 책 <소돔 120일>은 그 번역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면서 누가 번역했는지는 끝내 미궁에 빠져 있다.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역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자녀들에게 내가 이런 책을 번역했다고 말할 수 없다." 책을 모두 읽은 후에서야 깨달았지만 이 한 줄의 문장은 <소돔 120일>을 접하기 전에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가장 훌륭한 지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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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 120일>의 줄거리를 일일이 설명한다는 것은 어리석다. 놀랍게도, 이 책은 무려 600가지의 상상할 수 조차 없을 만큼 음탕하고 비윤리적인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페이지 수로는 700페이지를 넘고, 그 가운데 서론이라 할 수 있을 서설이 100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4부로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300 페이지 이상이 1부에 할애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부를 제외한 나머지 장(章)에서는 소설의 형식이 아니라 마치 일기처럼 그날 그날의 에피소드만을 단순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줄거리를 말해야 한다면 아주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설명 될 수 있겠다. “루이 14세 재위 기간의 마지막 무렵, 가진 것이라고는 돈과 시간뿐인 네 명의 남자가 놀다 지친 나머지 24명의 성적 노리개들을 데리고 고립된 별장으로 들어가 넉 달 동안 상상 불가능한 음행을 벌이다 돌아온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이 책의 내용을 들여다 보자. 앞서 말한 네 명의 남자는 각각 블랑지스 공작, 그의 동생인 주교, 징세 청부인 퀴르발, 그리고 판사 뒤르세이다. 이들 모두는 성적으로 비정상적인 취향을 지니고 있고 주교라는 직업을 가진 블랑지스 공작의 동생까지를 포함해서 철저한 무신론자들이다. 어느 날, 퀴르발이 공작의 큰 딸에게 청혼을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이후의 상황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친절하게도 사드는 이 부분에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주고 있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이들의 관계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쥘리의 아버지인 공작은 뒤르세의 딸 콩스탕스의 배우자가 되었고, 콩스탕스의 아버지 뒤르세는 판사의 딸인 아델라이드의 배우자가 되었으며, 아델라이드의 아버지인 판사는 공작의 큰 딸 쥘리의 배우자가 되었고, 알린느의 삼촌이자 대부 격인 주교는 알린느에 대한 권리를 계속 유지하면서 그녀를 친구들에게 양보하고 다른 세 여자의 배우자가 되었다.
-<소돔 120일>, 고도출판사 pp. 22-23
이 기묘하고 어이 없는 모임은 공동의 재원을 각출하여 연회(야회)를 진행한다. 남녀를 제공하는 중매인 4명을 두고, 1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야회를 갖는데 첫 모임에서는 남색을 즐기고, 두 번째에서는 아름다운 처녀들과 함께, 세 번째 모임은 추잡하고 불결한 여성들과, 마지막 모임은 일곱 살에서 열 다섯 살 사이의 숫처녀인 소녀들과 벌인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에는 숙녀 네 명과 함께 연회가 아닌 소규모의 모임을 갖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다.
예상하겠지만, 아무리 즐거운 놀이라도 그것이 이렇듯 연이어 이루어지면 흥미가 덜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 색골들은(사드는 악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음란행위를 통해 청각기관을 뺀 나머지 감각 기관들을 최고로 만족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후 그 상태에서 차례대로 온갖 음담패설을 늘어놓는다는 기묘한 생각을 해 내고, 그로부터 <소돔 120일>의 전주곡이 울리기 시작한다.
이 기괴한 여흥을 위해, 이들은 네 명의 이야기꾼을 섭외한다. 각각의 이야기꾼은 150가지의 이야기를 30일 동안 이들에게 전하며 그 에피소드들의 주인공은 때로 중복되기도 한다. 뒤클로 부인은 단순한 150가지의 정열을, 샹빌 부인은 그룹 섹스에 대한 150가지의 이야기를, 마르텐느 부인은 가장 범죄적이고 법률, 자연, 종교에 대해 극한의 모욕을 주는 150가지 괴벽을 이야기하기로 정해져 있으며 마지막으로 데그랑주 부인은 고문과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150가지 준비해 둔 상태에서,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좋을 8명씩의 소년 소녀가 이 모임을 위해 강제로 끌려온다. 그리고, 이 네 악당이 수동적 남색을 즐기게 해줄 색골 8명과 노파 하녀 4명이 동원되며 요리사 여섯 명과 각자의 부인 네 명을 합쳐 고립된 별장으로 향하는 인원은 모두 마흔 여섯 명, 그러나 120일이 지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올 때 그들의 숫자는 열 여섯 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서른 명은, 이미 이 악당들에 의해 ‘먹어 치워진 상태’라고 사드는 표현한다. 뒤클로 부인이 이야기하는 첫 150개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태로 쓰여 있으나, 그 이후의 450개 에피소드는 그마저도 귀찮았던 듯 번호가 붙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소돔 120일>의 전체적인 줄거리이다.
<소돔 120일>을 대하기 전에, 나는
신성 모독과 수음기술의 교습이 자행되는 악당들의 별장. 사디즘, 마조히즘, 네크로필리아, 관음증을 평범하고 단순한 정열로 구분하는 대담함. 근친상간, 그룹섹스, 롤리타 콤플렉스의 발현, 대소변을 받아 마시고 수동적 남색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이들에의 역겨울 정도로 자세한 묘사는 이 책을 네 번이나 읽는 동안에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사드 자신의 감정이 배제된 채, 건조한 문체로 딱딱하게 나열되어 있는 2,3,4부를 읽으면서는-솔직히 말하자면 읽었다기보다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뇌에 문자를 새겼다는 표현이 낫겠다. 처음에는 읽었다는 표현을 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이 책이 괴로움의 대상이었다- 영상보다 문자가 더욱 자극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해야 했다.
나는 <소돔 120일>을 네 번 읽었다. 처음 한 번을 읽는 데 2주가 걸렸고, 마지막 네 번째에는 두 시간이 걸렸다. 매번 읽을 때마다 속이 불편하고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학부 시절, 문예사조 수업의 레포트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탐독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처음에 책을 폈을 때는 너무도 자극적인 장면 장면에 묻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이 나중에는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었다. 사드의 묘사를 그대로 영상으로 표현해 놓았을 때의 모습이란 분명히 천박하고 역겨워 보일 것이다. 그것은 이탈리아 출신인 피에르 파울로 파졸리니 감독의 <살로, 소돔의 120일>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사드의 <소돔 120일>을 파시스트들이 날뛰던 시대로 옮겨 그린 이 영화는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C급 포르노 필름 정도로 평가 받았고, 전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차마 영화관에서 상영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몇 해 전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에는 관객의 절반 이상이 영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이 영화의 DVD가 판매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영상으로의 전환을 거치기 전의 상태, 즉 작품이 독자의 눈을 통해 대뇌에 인식된 다음 그것이 자연스럽게 영상으로 옮겨가기 전의 상태에서 보면 <소돔 120일>을 이루고 있는 사드의 문장력은 대 문호라 불리는 이들의 그것에 비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훌륭하다. 그리고 그 문장들 간에는 편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문장들은 현학적이고, 논리정연하며,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한다. (불행히도 제일 마지막에 거론한 종류의 문장은 지극히 희박하다는 것이 이 작품의 비극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드를 정신병원에 오랜 기간 갇혀 있다 보니 정말 미쳐버린, 혹은 성(sex)을 매개로 돈을 벌어보고자 한 호색한에 파렴치범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일찍 태어났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운한 천재라고 이야기한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도 이른 것 같다. 설령 사드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나는 사드를 천재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며 여전히 사드는 호색한이라는 오명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려 3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 시대는 사드의 사고방식과 표현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낡아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드가 적어 내려간, 그래서 <소돔 120일>을 이루고 있는 수없이 많은 음탕하고 낯뜨거운 이야기들이 비단 그의 상상력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sex 라는 주제를 제시하면서, 나는 이미 이 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이런 주제를 다루고, 또 반드시 이 책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사드가 단순히 광기어린 미친 놈이 아니라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라는 말을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새롭게 이 블로그에 참여한 군신 한 분-_-을 환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참로고, 소돔 120일은 현재 절판 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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