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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01812 / 눈] Fucking idiot by 김교주

사람의 몸이 만금이라면 눈은 9천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정확한 표현은 기억 안 나지만 대충 저렇다는 얘기다.  그만큼 눈이, 시각이 사람의 오감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이야기인 걸로 이해하면 그걸로 족하다.

그리고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눈을 잃은 한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잃었던 눈을 다시 찾는 이야기.

그가 아내를 잃은 것은 맹인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맹인이었는데도 어여쁜(! ) 아내를 가진 사내였다고 해야 맞다. 그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런데 그는 예쁜 아내는 가졌지만 그녀를 부양할 만한 능력은 없었던 인간임에 분명하다. 아내가 죽은 뒤, 기댈 데라고는 자기밖에 없는 어린 딸에게 그가 한 짓들을 생각하면 그런 의심은 더 심화된다. 그는 딸을 부양했다기 보다는, 간신히 딸의 목숨줄만 붙여놓았다가, 딸이 자신을 건사할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되자 무위도식하며 딸에게 자신의 의식주를 떠넘긴다. 영문도 모른 채 딸은 장님인 아버지의 수족이 되고, 그것도 모자라 집의 가장이 된다.

그러나 그의 병신스러움이(그의 육체에 대한 폄훼가 아니다, 그의 정신머리에 대한 이야기일 뿐) 가장 두드러지는 곳은 사기꾼의 달콤한 꼬드김에 넘어가 잃었던 시력을 다시 찾겠다며 딸을 팔아 넘기는 챕터다. 몸은 자랐을 지 몰라도 아직 미성년자에 불과한 딸은 더더욱 멍청하게도 아버지의 결정에 반기를 들기는 커녕 제가 앞서서 팔려가는 몸이 되겠다고 나댄다. 이쯤되면 둘 다 분명히 제정신은 아닌듯.

딸이 팔려가고, 그렇게 해서 그가 시력을 찾았다면 또 모르겠다. 너무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는 딸만 뺏기고 여전히 맹인인 채 홈리스 신세가 되어 구걸을 하며 행려병자에 가까운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의 딸에게는 마치 영화 < 아저씨> 의 원빈처럼 자신을 구해 줄 영웅이 있었다. 그 영웅은 딸을 팔려간 신세의 가여운 여자 처지에서 구해주고 그걸로도 선행이 가볍다 싶었는지 맹인 남자를 찾아내어 밝은 세상을 보게 해준다. 딸을 만나게 해주는 건 물론이고.

결국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지만 늘, 이 소설을 읽을 때면 기분이 더럽다.  대체 주체적인 여성상은 어디에 있으며 아비란 작자는 무슨 뻘짓을 하는 거냔 말이지.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아주 불가능한 아야기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심청전이, 언제적 이야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