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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01812 / 눈] 보이지 않는 사랑 by 에일레스

 

루벤은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시각장애인 청년이다.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그는 난폭하기가 그지없어 매일같이 고용인들과 어머니를 괴롭힌다. 어느날 어머니는 루벤을 위해 그에게 책을 읽어줄 사람을 고용하고, 그렇게 마리가 루벤의 집으로 온다. 마리는 어린 시절의 학대로 인해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심한 흉터가 남아있는, 30대 중후반 쯤 되는 여성이다. 마리는 난동을 부리는 루벤을 완력으로 제압하고, 처음엔 당황해하던 루벤은 서서히 마리에게 관심을 가진다.

 

 

 

(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블라인드 (Blind, 2007)

개요 드라마, 멜로/로맨스 98분 네덜란드 외
감독 타마르 반 덴 도프
출연 요런 셀데슬라흐츠, 핼리너 레인, 카테리네 베르베케, ...

 

 

 

<블라인드>는 독특한 사랑 이야기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젊은 청년과 흉한 외모를 가진 나이 많은 여성의 사랑이란, 사실은 그다지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다. 영화 후반부에 루벤의 주치의인 빅터 박사 역시 마리를 만났을 때 그것을 직설적으로 말한다. 루벤과 어울리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고,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힘든 나이 아니냐고.

하지만 영화는 보여지는 것 이외의 것들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벤은 마리를 만나면서부터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마리가 책을 읽어주는 목소리를 들으며, 어둡고 뿌옇던 루벤의 세상은 조금씩 색과 컬러와 사물이 생겨난다. 위의 이미지들이 루벤이 마음 속으로 보는 장면들이다. 눈송이가 날리고, 기린이 정원을 거닐고, 목욕물 속에 물고기가 떠다니는 것. 루벤이 조금씩 마음으로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들이다.

 

 

 

마리는 외모에 심한 컴플렉스가 있었다. 흉터 투성이인 마리의 얼굴은 누구든 처음 보면 약간씩 흠칫하게 만드는 것으로 영화에서 묘사된다. 마리가 처음 루벤의 집에 오고 나서 했던 행동 중 하나는 거울을 천으로 가리는 것이었다. 마리는 루벤에게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한다. 머리는 빨강색이고, 눈은 초록색이라고. 나이는 21살이라고. 루벤은 마리를 아름다운 여성으로 상상해버리고, 루벤의 어머니는 점점 상태가 좋아지는 루벤에게 딱히 부정을 하지 않은 채 그냥 그렇다고 해 준다.

루벤은 마리의 손이나 얼굴을 만지길 강렬히 원하고, 처음에는 스킨십에 몹시 강한 거부감을 보이던 마리는 점차 루벤이 자신을 만지게 그냥 둔다. 그리고 루벤으로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마리는 감동한 듯 엷은 미소를 짓는다. 자신의 흉한 외모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봐 주는 루벤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행복하던 그들의 관계가 끝난 것은, 루벤이 시력을 되찾기 위한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다. 루벤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두려워하던 마리는 루벤을 떠나버린다. 마리는 루벤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기고, 루벤의 어머니는 그 편지를 빅터 박사에게 맡기고 적당한 때가 되면 루벤에게 주라고 부탁한다.

마리가 떠난 후 루벤은 극도히 괴로워하고, 계속해서 마리를 잊지 못한다. 눈 수술을 한 후 회복 기간에 루벤이 계속 되뇌이던 것은 처음 마리가 루벤에게 읽어주었던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의 책 구절이었고, 시력을 찾은 후 루벤의 방황을 보다 못한 빅터 박사가 보낸 홍등가에서도 루벤은 자신이 알고있는 마리의 모습인 빨강 머리 여자를 찾다가 절망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완전히 시력을 회복한 루벤은 도서관에서 안데르센 동화집을 찾다가 마리와 재회한다. 처음엔 마리를 알아보지 못했던 루벤은 향기와 목소리를 통해 마리를 알아본다. 루벤은 마리에게 자신과 함께 가자고 간청하지만, 마리는 루벤을 받아주지 않는다.

"난 동화같은거 믿지 않아."

마리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서의 동화란, 그들이 사랑할 수 있었던 세상이다. 외모나 나이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던 루벤과 마리의 세상은, 루벤이 눈을 뜸으로서 현실로 바뀌었다. 현실은 동화와 달라서, 마리는 루벤이 눈으로 보면서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던 것이었다. 마리는 루벤에게서 도망치고, 루벤은 절망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빅터 박사가 루벤에게 마리의 편지를 전해준다.

 

 

 

마리는 눈으로 보지 않을 때의 세상,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봤을 때의 진실한 사랑에 대해 얘기한다. 그 편지를 읽은 루벤은 정원으로 걸어나와서, 얼음 조각에 스스로의 눈을 찌른다.

 

 

 

 

그리하여 영화의 마지막 장면. 루벤은 두 눈을 가린채 정원에 앉아있다. 그를 둘러싼 정원의 풍경은 예전에 그랬듯, 마음 속으로 보는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이다.

 

이것은 해피엔딩일까?

그는 다시 마리를 만나고 사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루벤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고, 진실한 사랑이 그것으로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루벤은 두 눈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미소를 짓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마리가 다시 루벤을 찾아올지 모른다. 눈을 뜬 루벤을 봤을 때 마리는 도망쳤지만, 다시 시력을 잃은 루벤을 본다면 마리 역시 루벤의 곁에 남을 것이다.

 

눈을 통해 보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보이는 것들에 얽매이는 사랑을 한다. 오직 사랑 하나만 보기는 참 어려운 세상이다. 이 영화의 특별함은 그 점에 있다. 현실에서는 아무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가 말한 '놀라운 사랑',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