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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01008 / 기억]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그러나, 기억은 기록의 어머니다. by 김교주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쓰며 자신의 경험을 은근슬쩍 끼워넣는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 그 경험들은 윤색되고, 미화되며, 과장되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 여기 내가 소개하려는 이 책을 쓴 작가는 자전적 소설의 대가라고 불려도 억울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많던싱아는누가다먹었을까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박완서 (세계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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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너무 유명한 책, 너무 유명한 작가.
감히 내가 손대어 어떻게 말해보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무게로 다가오는 이 책.

한국 전쟁에 대해 내 세대는 어떤 기억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시쳇말로 닳고 닳은 소재라는 것 역시 부인할 수가 없다. 숱한 타자의 기억들이 인쇄물로 던져지고 넘치고 흐르는 정보의 과잉은 한국전쟁을 굴리고 굴리다 못해 너덜너덜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박완서 선생은 여기에서 대가의 면목을 보이고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하 <싱아>)는 "격동의" 시대를 보낸 박완서 선생의 자전적 소설 연작의 첫번째 책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일찍 잃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박적골에서의 유년과 어머니를 따라 상경한 후 전쟁을 맞은 1950년까지를 다룬다. 이 극악의 대비는 박완서의 매서운 필치 속에서 빛을 발하며, 작품은 내내 작가의 (불확실할 것임에 분명한) 기억에 의존하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이것은 분명 사실이라는 확신을 줄 정도로 생동감 있고 사실적이다. 

<싱아>를 관통하는 정서는 분명 그리움이다. 각박하고 힘겨운 서울살이, 어머니의 고초와 오빠의 고생을 보면서도 작가에게 그러한 과거가 그리움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마도 그 시절에는, 그래도 오빠가 살아 있었고 그녀 또한 젊음과 청춘에 휩싸인 영혼이어서였기 때문이 아닐까.
<싱아>를 집필하며 그녀는 얼마나 아름답고 또 얼마나 처참한 기억의 파편 속에서 유영했을까. 

어디까지가 기억에 의존한 기록이고, 또 어디까지나 가상의 이야기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함으로 나를 매료시킨 이 책을 손에 쥔 당신이라면 분명 이 연작의 두번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 책까지를 읽었다면 부디 <나목>을 읽어보기를 권유하고 싶다. 박완서는, 그런 작가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지만, 그 기록은 분명 기억이라는 어머니의 소생임을 잊지 않게 해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