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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01703 / Exotic] 이국적인, 더할 나위 없이. by 김교주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 작가가 내게 말을 걸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테니 한 번 들어 달라는. 내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우리 집안의 이야기라는.

 

2차 대전을 겪으며 한국이 어떤 상황에 놓였었는지는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좋겠지. 그런데 그것과 정말 비슷한 이야기를 말레이시아 사람의 입으로 듣는 기분은 좀 달랐어.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말레이시아에서도 똑같이 일어났었다는 게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말야.

 

이 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아. 락슈미인 것 같기도 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단초가 되는 카세트테이프를 만들 생각을 했던 딤플인 것 같기도 하거든.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누가 주인공이냐가 아니라 내가 이번달 주제를 공유하면서 말했던 이국적인 인상이겠지.

 

 

쌀의 여신이란 인도네시아 전통에서 비롯된 표현이지만...

 

 

 

 

 

여기까지 써두고 책을 추가했다. 원래 소개하려던 쌀의 여신 을 모두 읽은 다음 집어든 이 책, <유리 궁전>에 놀랐기 때문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지 모르겠다.

 

 

 

 

 

중부 버마의 겨울, 인도 출신 소년인 라즈쿠마르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 소설은 범상치가 않다. 영국, 인도, 태국, 싱가포르, 미국을 오가며 벌어지는 일들. 세포이 항쟁이 언급되고 버마의 마지막 왕가에 대한 상상력이 넘쳐난다. 소설은  인도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버마에서 성공하는 라즈쿠마르와 그가 첫눈에 반한 버마 왕비의 시녀 돌리를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등장 인물들의 면면이 나름의 드라마를 일구며 각각의 매력을 발산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쌀의 여신과 유리 궁전은 둘 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제국주의의 지독한 그늘과, 그 격변의 시대를 배경으로 평범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사랑과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놀랄만큼 닮아 있다. 게다가, 2차 대전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릴 유럽이나 미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시아, 그 중에서도 한중일 3국이 아닌 동남 아시아를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국적이고 독특한 그 어디에서도 접하기 힘든 배경을 만나게 된다는 점, 두 소설의 주인공은 한 쌍의 부부라는 점, 그 부부의 후손들이 겪는 이야기를 다양한 시선에서 바라보고 서술한다는 점......

 

<쌀의 여신>은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사리의 색깔, 결혼식 풍경, 인물의 생김새 같은 즉각적이고 시각적인 부분을 강조하여 한 편의 영화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며, 그 가운데 등장하는 말레이시아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 소설을 진행시키는 하나의 큰 축으로 작용한다.

 

반면 <유리 궁전>은 인물의 심리를 아플 정도로 파헤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작품이다. 말레이시아의 고무나무 농장과 버마의 유리 궁전에 대한 묘사는 물론 훌륭하지만, 서사는 이미지들이 아닌, 각 등장 인물들의 행동과 말투, 그리고 그들의 심리상태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을 통해 완성된다.

 

 

 

나는 이 세 권의 책을 3년 전에 구입했었다. 그리고 2017년 올해가 되어서야 완독을 하고, 이렇게 서평을 남기고 있다. 게을러서였는지 바빠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래 전에 사둔 책이 이렇게 쓸모가 있었으니 다행 아닌가.

 

 

오늘도 서툰 글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맺는다. 그리고 4월부터는 무기한 휴식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는 슬픈 소식을 함께 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