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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01703 / Exotic] warm shower. by 란테곰

 

난 초등학교 입학 전에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유치원을 다니던 또래 아이들에 비해 자유롭게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만큼 혼자인 시간도 많았다.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천만 다음의 숫자 단위는 과연 무엇인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보조 바퀴 달린 자전거를 타며 집 앞 공터를 계속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집으로 돌아와 슬슬 눈치를 보다 이층 하와이 형네 놀러갔었다.

 

어깨까지 기른 머리를 뽀글이 파마를 하고선 늘 꽃무늬셔츠를 입고 온종일 팝송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그 형네 집엔 직접 녹음한 팝송 테이프가 가득했다. 같이 방에 앉아 노래를 듣다 얼핏 아는 노래가 나오면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말도 안 되는 가사로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것이 귀여웠을까. 그 형은 날 참 예뻐했다. 하지만 엄마도, 할머니도, 외삼촌도 그 형과 어울리는 것을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하와이형이라 불렀지만 우리 식구 모두는 그를 히피라 불렀다. 저렇게 양물 먹은 놈이 대학교 다니다 데모하고 다니고 그런다면서. 난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 나중에 하와이형한테 물어봤지만 하와이 형은 그냥 웃고 말았다.

 

그 때 그 형과 가장 자주 들었던, 아니 내가 좋아해서 자주 틀어달라고 졸랐던 노래가 있다. 그 노래야 말로 내 인생 처음 외국 문화와 접하면서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다른 느낌에 감동을 받았던 것이라 생각한다. 아직도 가끔 조건반사처럼 흥얼거리기도 하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얘길 이어나가보자.



 

 

외국에 일하러 나갔었던 아버지가 귀국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이사를 했고, 비닐하우스에서 살기 시작했다. 집은 예전보다 두 배는 커졌지만 여전히 연탄보일러를 때던 집에서 겨울을 나다보니 따뜻한 물로 씻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엄마는 매일 새벽 큰 들통에 물을 가득 채워 보일러 위에 얹어놓았다가 나랑 동생이 일어나면 씻으라고 따뜻한 물을 주시긴 했지만 샤워는 꿈도 꾸질 못했다.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을 보면 어떤 영화든 흰 욕조에 따뜻한 물을 한가득 담아두고선 거기에 몸을 담그는 장면이나, 김이 펄펄 나는 물로 샤워하는 장면이 가끔 나오는데, 난 그게 그렇게 좋을까? 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내가 목욕탕에 가서 느끼는 그 기분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부모님 모두 세신사를 하셨던 적이 있어 그 당시 목욕탕을 무지 자주 다녔지만 난 그게 싫어 오히려 도망만 다녔었는데. 피크닉이나 바나나우유 안 사 주면 안 간다고 떼만 썼는데.

 

중학교에 올라가고선 친구들과 함께 종종 목욕탕에 갔다. 하지만 말이 목욕탕에 가는 것이지 물장난과 근처 분식점, 그리고 오락실 방문이 주된 이유였기에 정작 우리들의 시간 대비 탕 입수 비율은 냉탕이 95%가 넘었다. 간혹 온탕에도 들어가긴 했지만 여전히 어른들이 말하는 시원함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의 보일러는 기름보일러로 바뀌긴 했지만 보일러 기름이 아까워서 네 가족이 한방에서 모여서 자곤 했던 시절인지라 더더욱 그랬다. 일반 수도가 아닌 지하수의 차가움은 뼛속까지 시릴 정도였지만 따뜻한 물 달라는 소리를 하기가 힘들어 우어어어어 소리를 내며 얼굴만 대충 씻곤 했다.

 

고등학교 때엔 학교가 워낙 멀어서 집에 오면 자기 바빴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이 풍비박산이 났다. 친척들은 학교만 잘 다니고 졸업만 잘 하면 된다 했지만 대학교를 갈 수 없는 인문계 고등학교는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하다 결국 직업반으로 빠지게 되면서 본격적인 내놓은 삶을 시작했다. 세탁기도 없는 반지하방에 남자 다섯이 살면서 몸을 씻어봐야 얼마나 잘 씻겠는가. 어쩌다 한 번 손빨래로 집에 있는 옷들을 빨아 놓으면 다들 내키는 대로 입고, 그 다음 날은 내가 입었던 옷을 누군가가 입고 있는 와중에, 온종일 DDR 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씻을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옷에 소금기가 배어나오는데도.

 

그러다 애인과 함께 모텔이란 곳을 가보게 되었다. 한겨울 추위를 뚫고 들어간 그 방은 내 집과는 달리 너무나도 따뜻했고 이불도 푹신푹신해 보이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애인은 먼저 씻겠노라며 욕실로 들어갔고, 난 아직 벌건 코와 얼굴을 마찬가지로 벌건 손으로 비비며 조금 있다 생길 일들에 대한 기대감에 흐히히힛, 하고 있었다. 이윽고 애인이 나왔고 나도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켰다. 그 순간.

 

알아버렸다. 따뜻한 물의 위대함을, 그리고 샤워기가 가져다주는 행복함을. 머리에서부터 온몸을 타고 흐르는 물에 녹아내리는 내 몸이 느끼는 환희를. 나와 마찬가지로 흐히히힛. 하면서 기다리다 지친 애인이 대체 뭐하냐고 욕실로 올 때까지 난 샤워기 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좋다. , 좋다.를 반복하면서. 어릴 적 영화에서 그들이 그렇게나 행복해하던 이유를 단 한 방에 깨달아버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나 따신 물을, 샤워를 찾았던 것이었구나. 


깨달음과 함께 노곤해진 몸으로 침대에 누워선 애인도 몰라보고 곧 코를 골아버렸다. 그 꼴을 바라보던 애인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지. 지금 생각해도 미안할 일이다다음 날 아침, 난 애인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선 어제 둘 다 기대했던 흐히히힛, 의 다음 스토리를 온 몸으로 성심성의껏 이어갔다. 이런 말은 좀 이상하겠지만 진짜(?) 열심히 했다.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난 뒤 난 다시 한 번 욕실을 찾았다. 어제처럼 마법과도 같은 무언가를 바라면서, 약간의 두근거림을 안고선 샤워기를 틀었다.

 


. 좋다. ,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