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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01702 / 적] 딱보와 전설의 형. by 란테곰

 

같은 동네라도 도로 하나를 두고 윗동네와 아랫동네로 나뉜 우리 동네에선 아이들끼리 묘한 텃세가 있었다. 부모들끼리의 알력 다툼도 종종 있었으니 그걸 보고 자란 아이들의 서로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고울 리가 없었다. 이유는 하나, 윗동네 사람들은 대체로 잘 살았지만 아랫동네인 우리 동네는 온 동네가 비닐하우스였다

윗동네엔 딱보라는 놈이 있었다. 딱지를 잘 쳐서 다들 딱보라고 불렀다. 학교에 가면서 딱지 하나를 만들어 집에 돌아올 때 가방 한가득 딱지를 담아오며 자랑하던 그 재수없는 얼굴은 아직도 기억한다게다가 딱보는 승부욕이 강했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렀다. 하나 잃으면 바로 열 개 스무 개를 꺼내 한 방에 걸자는 식으로 애들을 질려버리게 만들곤 했었다. 그렇게 두어 판을 지면 꼭 지네 삼촌이 하는 동네 수퍼로 가서 라면 박스에 가득 담긴 딱지 박스를 꺼내와 자기가 이길 때까지 계속 물량전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겨놓고 늘 잘난 체를 하니 모두들 딱보를 고깝게 여기는 것이 당연했다하지만 그 딱보도 우리 동네 애들이랑은 붙기를 피했다. 왜냐면 우리 동네엔 전설의 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전설은 바로 다름 아닌 딱지와 구슬이었다. 동네 제일의 큰손(?)임과 동시에 최고의 승부사. 당시 해적판이 날뛰던 드래곤볼 만화책을 그 형은 전부 정발본으로 수집했는데, 용돈이 적었는데도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원정(?)을 통한 구슬의 수집에 이은 유통을 통한 이득이었다고 직접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우리 동네에서 누가 구슬 다 잃었다고 엉엉 울면서 그 형을 찾아오면 며칠 내에 따 간 사람의 구슬을 싹쓸이해와 일정 부분을 나눠주는 의적과도 같은 행동도 종종 했다. 자연히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난 그 형과 형의 누나, 부모님과도 친해 종종 찾아가 만화책도 보고, 넉살 좋게 밥도 얻어먹고 오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졌다. 당시 여름만 되면 늘 물난리가 나던 아랫동네에 다시금 물난리가 찾아왔다. 다들 피난을 갔다 돌아와 흙탕물에 찌든 세간 살림을 닦아내는데 윗동네 아주머님들도 총동원되어 다 같이 고생하던 와중 수재의연품이라는 것이 왔다. 음식과 생필품, 담요부터 학용품까지 담긴 큰 박스였다. 문제는 그걸 집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나눠주는 바람에 물건이 탐난 윗동네 사람들 중 몇몇이 아이를 시켜 자기네 집에도 물들어왔다며 생떼를 부려 결국 그 수재의연품을 받아가면서 탈이 났다. 당장 어른들부터 난리가 났다. 아랫마을에선 평소에는 거지 취급하더니 동냥 그릇 뺏어먹느냐며, 윗마을에선 아니 같이 힘들고 같이 고생하는데 말이 너무 심하시다는 둥 격한 말이 오갔다. 격한 말은 격한 말을 부른다. 그리고 거기에 술이 더해지면 목소리가 커진다. 급기야 마을 사람들 사이에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걸 보며 그저 서로에 대한 적의심을 키워갔다. 특히나 딱보네가 그 의연품을 타갔다는 것은 결정타였다. 딱보네 아버지는 윗동네의 유지 격이었으니 큰 사건이 될 법도 했다.

그렇게 동네 사이의 뒤숭숭한 분위기가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딱보가 또 사고를 쳤다. 우리 동네 어린 애에게 시비를 걸어 때리고 돈을 뺏었다. 맞은 애 아버지는 물론 아랫동네 아저씨들이 모두 모여 당장 딱보네를 쫓아갔다. 다행히(?) 집에 딱보가 없었고, 딱보네 아버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수재의연품 건과 이번 사건 모두를 포함해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 날 저녁 딱보네 집에서 매타작 소리가 난 것은 당연했으나 모두들 딱보보단 딱보네 아버지를 욕했다. 의연품 건도 아들에게 시킨 것이고 평소 애 교육도 잘못 시킨 것이니 애를 탓할 일이 아니라 했다. 하지만 아이들 사이에선 같은 동네 사는 꼬맹이를 때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눈 밖에 났다딱보는 순식간에 고립되었다.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놀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몇몇 동네 아저씨들도 딱보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을 정도였다. 헌데 유일하게 한 명, 우리 동네 전설의 형이 딱보를 챙겼다. 그 형의 심복 비슷한 역할이었던 나와 함께 같이 딱보를 데리고 놀아주며 그의 잘못에 대해 분명히 가르쳐주었다. 형의 얘기를 듣고 한참을 가만히 있던 딱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을 뺏었던 꼬마의 집에 찾아가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걸 지켜본 우리 동네 애들은 모두 다시 딱보와 놀았다. 재수 없는 놈이긴 했지만 나쁜 놈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애가 지애비보다 낫다며 칭찬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고립의 대상이 딱보에서 딱보네 아버지로 바뀌었다동네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딱보네는 결국 이사를 간다고 했다. 이사 가기 전날, 딱보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딱지를 가져와 저번의 꼬맹이에게 주면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