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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01106 / 타이밍] 차라리 조금만 어긋나 주었더라면 by 김교주

적기, 라는 한국어 표현이 있지만 타이밍이라는 영단어의 뉘앙스를 따라가지는 못할 것 같다. 

어떤 책을 고르더라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써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주제였다. 타이밍이란 게 그렇다. 인생도 사랑도 타이밍, 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디에 갖다 붙여도 어색함 없이 어울릴 단어.
그러나 나는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골랐다. 


오만과몽상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대표소설
지은이 박완서 (세계사,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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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기업인을 낳고, 악덕기업인은 현이를 낳고...동학군은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도배장이는 남상이를 낳고...' 

책 표지에 적혀 있는 구절이다. 이 책을 통해 끊임 없이 반복되는 문장들이며, 타이밍이라는 주제가 던져졌을 때 내가 이 책을 떠올리게 만든 부분이기도 하다.  이 구절에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현대사의 아이러니가 가감없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비극적인 삶의 순환과 타이밍 속에 던져진 두 청년, 현이와 남상이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이 두 사람은 정확히 같은 세대를 타고난 친구"였다".
내가 이들이 친구"였음"을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작품 속에서 교차편집되는 이들의 삶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작가 특유의 매서움으로 지독한 대비효과를 내면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두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 없이.

남상이와 현의 가족 내력은 위에 적은 문장에서와 같다. 그러나 이들의 조상이 이들처럼 긴밀하게 얽혀서 누구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삶에 그 어떤 농밀한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바로 그 조상의 흔적 때문에 갈등하고 반목하다가 결국 절교하고 만다.
남상의 할아버지가 그들의 조상 이야기를 밝힌 타이밍은 아주 바람직하게도(!) 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의 일. 졸업 후 남상은 의사가 되고자 했던 꿈을 (너무도 당연하게) 접고,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현은 자신을 내친 남상에 대한 반감으로 의사가 된다.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은  한 여공원(女工員) 영자라는 교차점에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소시민과 대학병원의 능력있는 의사의 모습으로 마주친다. 한때 현이 필요로 만났고 지금은 남상의 부인인 그녀는, 그 곳에서 목숨을 잃으며 두 남자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이 또한 타이밍의 농간일까. 

남상과 현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오만하고, 또 다른 의미에서 몽상가의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젊은 날의 치기와 나이든 이후의 허세 가득한 자만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습에서는 다르지만 그 내면으로는 같은(그러니까 마치 "열등감과 우월감은 서로 얼굴이 다른 쌍둥이였다"라고 선생이 다른 책에서 말한 것처럼)  감정들을 어쩔 수 없이 공유하며 살고 있다. 타이밍, 이라는 절묘한 이름의 친구를 하나 더 둔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