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1953년 봄, 경성상회 2층 사진관 자리에 27세의 여의사가 산부인과를 개업한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산부인과에 드나드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던 시대,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의술은 조산이 아니라 중절에서 빛을 발하리라는 것을.
박완서 선생의 1983년 작, 단편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은 이처럼 강렬하게 그 도입부를 연다.
산부인과를 개업하던 화자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던 경성상회 주인 황씨에의 복수는 생각보다 일찍 이루어진다. 황씨의 결혼하지 않은 딸이 겁탈의 증거로 만삭의 몸이 되어 등장한 것이다. 첫 조산을 훌륭히 겪어낸 그녀에게는 하지만 그 때 이후로 수십년 동안 다시는 해산을 도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동네 부근에 양공주촌이 들어서고,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성병의 치료와 소파 수술뿐. 그렇게 쉬흔 다섯이 되어가는 그녀의 병원은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될 상황에 놓이고 화자는 55세가 되기 전에 한 번만 더 새로운 생명을 받고 싶다는 뜻 모를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이하 가을)의 산부인과는 원래 사진관 자리였다. 처음 이사를 해 오던 날 거기에는 사진관에 더할나위 없이 잘 어울리지만 병원에는 어색한 녹색 우단 천을 씌운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화자의 아버지가 병원을 방문에 그 의자에 앉으면서 하나의 사진이-인화지가 아니라 화자의 가슴에 현상되는 사진이 만들어진다. 병원과는 좀체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의자가 아버지의 착석으로 인해 빛나고, 아버지 또한 의자에 앉아 화자에게 잊지 못할 이미지를 남기는 것과 동시에 "의술을 올바른 곳에 써 주기를 바라며"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새겨진 액자를 화자에게 선물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아이러니라 할 만 하다. 생각해보라.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니까. 자신의 의술이 쓰일 곳은 생명을 살리는 쪽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사실을.
황씨의 손자를 받아내는 순간, 그 순간은 화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또 하나의 사진으로-역시 뇌리에 아로새겨지는- 현상된다. 그 후로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면서, 그녀는 끝없이 바라는 것이다. 그 때처럼, 한 번 더 출산의 현장에 있을 수 있기를. 새 생명의 탄생에 조력자가 되기를. 조산(助産)의 희열, 그 감각을 한 번만 더. 산도를 빠져나온, 더 이상은 태아가 아니라 신생아인 아기가 눈을 반짝 뜨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 찰나의 기적. 이보다 더 선명한 사진이 어디 있을까.
이 두 장의 사진(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뇌리에만 아로새겨진)은 스물 일곱의 화자가 쉬흔 다섯 가까운 나이가 되는 동안 서서히 빛이 바래고 당시의 화사함(화려함)을 잃어간다. 그저 기억 속의 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을 뿐, 더는 현실이 아니고 돌아갈 수도 없으며 재현한다는 것은 오히려 더 초라해지는 결과만을 낳는다는 사실이 소설 후반부에서 처절하게 드러나고 있다. 마치, 현실 세계에서의 사진이 그러하듯이.
카메라는 인간의 눈을 본따서 만들어진 기계라고 한다. 사람이 눈으로 본 형상을 머리에 남기듯 카메라는 렌즈를 투과한 장면을 인화지에 남기는 법. 그리고 그 결과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원래의 모습을 잃어간다. 슬프고, 서러운 일이다.
사족: 얼마 전 빛편지 군을 만났소. 여전히 키 크고 여전히 목소리"는" 중후하고 여전히 귀엽더군. 다른 두 사람은 언제쯤 시간을 낼 수 있는게요?
박완서 선생의 1983년 작, 단편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은 이처럼 강렬하게 그 도입부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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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를 개업하던 화자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던 경성상회 주인 황씨에의 복수는 생각보다 일찍 이루어진다. 황씨의 결혼하지 않은 딸이 겁탈의 증거로 만삭의 몸이 되어 등장한 것이다. 첫 조산을 훌륭히 겪어낸 그녀에게는 하지만 그 때 이후로 수십년 동안 다시는 해산을 도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동네 부근에 양공주촌이 들어서고,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성병의 치료와 소파 수술뿐. 그렇게 쉬흔 다섯이 되어가는 그녀의 병원은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될 상황에 놓이고 화자는 55세가 되기 전에 한 번만 더 새로운 생명을 받고 싶다는 뜻 모를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이하 가을)의 산부인과는 원래 사진관 자리였다. 처음 이사를 해 오던 날 거기에는 사진관에 더할나위 없이 잘 어울리지만 병원에는 어색한 녹색 우단 천을 씌운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화자의 아버지가 병원을 방문에 그 의자에 앉으면서 하나의 사진이-인화지가 아니라 화자의 가슴에 현상되는 사진이 만들어진다. 병원과는 좀체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의자가 아버지의 착석으로 인해 빛나고, 아버지 또한 의자에 앉아 화자에게 잊지 못할 이미지를 남기는 것과 동시에 "의술을 올바른 곳에 써 주기를 바라며"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새겨진 액자를 화자에게 선물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아이러니라 할 만 하다. 생각해보라.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니까. 자신의 의술이 쓰일 곳은 생명을 살리는 쪽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사실을.
황씨의 손자를 받아내는 순간, 그 순간은 화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또 하나의 사진으로-역시 뇌리에 아로새겨지는- 현상된다. 그 후로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면서, 그녀는 끝없이 바라는 것이다. 그 때처럼, 한 번 더 출산의 현장에 있을 수 있기를. 새 생명의 탄생에 조력자가 되기를. 조산(助産)의 희열, 그 감각을 한 번만 더. 산도를 빠져나온, 더 이상은 태아가 아니라 신생아인 아기가 눈을 반짝 뜨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 찰나의 기적. 이보다 더 선명한 사진이 어디 있을까.
이 두 장의 사진(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뇌리에만 아로새겨진)은 스물 일곱의 화자가 쉬흔 다섯 가까운 나이가 되는 동안 서서히 빛이 바래고 당시의 화사함(화려함)을 잃어간다. 그저 기억 속의 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을 뿐, 더는 현실이 아니고 돌아갈 수도 없으며 재현한다는 것은 오히려 더 초라해지는 결과만을 낳는다는 사실이 소설 후반부에서 처절하게 드러나고 있다. 마치, 현실 세계에서의 사진이 그러하듯이.
카메라는 인간의 눈을 본따서 만들어진 기계라고 한다. 사람이 눈으로 본 형상을 머리에 남기듯 카메라는 렌즈를 투과한 장면을 인화지에 남기는 법. 그리고 그 결과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원래의 모습을 잃어간다. 슬프고, 서러운 일이다.
사족: 얼마 전 빛편지 군을 만났소. 여전히 키 크고 여전히 목소리"는" 중후하고 여전히 귀엽더군. 다른 두 사람은 언제쯤 시간을 낼 수 있는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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