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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01103 / 몰입] 그의 예쁜 눈동자 by 에일레스


영화를 좋아하시는 엄마를 둔 덕에, 난 어렸을 때부터 또래에 비해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었다. 다섯살 무렵부터 우리 집에 VTR이 있어서 비디오도 참 많이 봤다. 중, 고등학교 때는 집 근처의 비디오가게 3군데가 모두 단골이었고, 어지간한 신작은 안본 게 없어서 '빌려볼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실 어렸을 때는 대부분의 영화를 '엄마가 빌려오는' 또는 '엄마가 빌려주는' 영화를 봤었다. 예를 들면, 우리 엄마는 성룡은 좋아한 반면 주윤발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덕분에 난 성룡 영화는 거의 다 본 대신 주윤발 영화는 거의 본 것이 없다. 한마디로, 그때는 취향이라는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재밌는게 재밌는거였다.

처음 생긴 '좋아하는 배우'는 키아누 리브스였다. 중학교 1학년때 본 <스피드>를 통해서였다. 영화도 재밌긴 했지만,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내가 본 제일 잘생긴 남자였다 +_+ 지금까지도 나는 그보다 잘생긴 남자를 보지 못했다. (캐나다 어학연수 갔다온 친구 말로는 그렇게 생긴 남자는 널렸다는데. 흥.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믿을 수 없어!!)

그리고 곧, 두번째로 좋아하는 배우가 생겼다. 
그 배우의 이름은 '게리 올드만'. 그 영화의 이름은 <레옹>이었다.


게리 올드만(Leonard Gary Oldman) / 영화배우
출생 1958년 03월 32일
신체 키17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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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
감독 뤽 베송 (1994 / 프랑스,미국)
출연 장 르노,나탈리 포트만,게리 올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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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에서 게리 올드만은 마약단속국(DEA) 소속의 형사이면서, 마약중독자이며, 마약 딜러이기도 한 노만 스탠스필드, 일명 스탠 역으로 등장한다. 그는 마약을 보관 중이던 마틸다(나탈리 포트만)의 아빠가 일부를 빼돌린 것을 알고 마틸다의 가족을 몰살시킨다. 무슨 짓을 어떻게 할 지 모르는 위험한 인물로, 누구나 다 그를 두려워한다. 그의 동료들조차도.

이 영화는 인상적인 장면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잊지 못할만큼 좋아하는 몇 장면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그가 마약을 복용하는 장면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마약에 든 캡슐을 담은 작은 통을 꺼내 귓가에 대고 흔들어 소리를 듣는다. 그 다음 캡슐을 하나 꺼내 이로 문다. 그리고 깨문다. 이떄 그는 기묘하게 몸을 비틀며 약을 '느낀다'. 그러고 나서, 약으로 인한 흥분이 그대로 드러나는 광기어린 표정으로 다음 일을 진행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어찌보면 진짜 그로테스크한데, 그만큼 리얼하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마약 중독자 역을 어찌나 훌륭하게 했는지, 전에 어떤 글에서 '마약 중독자는 게리 올드만, 알콜 중독자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최고'라고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ㅋㅋ


그리고 또 하나의,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잔뜩 무장한 마틸다가 마약단속국 건물로 잠입했을 때, 마틸다를 화장실로 유인한 그가 화장실 문 뒤에서 스르르 나타나는 장면이다. 어렸을 때는 이 장면이 어찌나 멋있던지! (솔직히 왜 멋있어보였는지 지금은 이해가 잘 안된다 ㅋㅋ)
지금은 DVD를 가지고 있지만, 어렸을 땐 VCD가 있었다. 내가 최초로 산 VCD가 <레옹>이었다. (지금은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게 없어져있다;) 그 VCD에서 저 장면을 캡쳐해서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놓고 혼자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처음으로 '직접' 넣은 바탕화면이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해본 캡쳐였던 것 같기도 하다.




 


게리 올드만의 매력은, 일단 그 엄청나게 뛰어난 연기력에 있었다. 영국 출신인데도 다양한 억양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어떤 역도 훌륭히 소화해낸다. 내 기억으로는, <레옹>에서 등장한 그를 기점으로 해서 악역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주연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를 좋아하게 되면서 그가 출연한 예전 영화들도 꽤 찾아 봤었다. <불멸의 연인>과 <브람 스토커의 드라큐라>는 그렇게 해서 보게 되고, 좋아하게 된 영화다.
무엇보다도 그의 매력은 그 눈에 있었다. 예쁜 색깔의 파란 눈동자인데, 광기에 가득 차 있을 때조차도 묘하게 슬프고 외로워보이는 눈. 그 눈으로, 그리고 표정으로, 그는 항상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아주 잘생겼다고 말할 수는 없는 얼굴인데도, 그는 눈을 떼기 힘든 매력이 있다.




<레옹>이 개봉한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여전히 게리 올드만을 좋아한다. 그리고 <레옹>은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목록에 들어 있다. 나는 사실 뭔가에 그렇게 몰입하는 성격이 아닌데 이 영화만큼은, 그리고 저 배우에게는, 정말 푹 빠졌던 것 같다. 게리 올드만을 좋아하게 된 시기쯤해서부터, 나에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생겼던 것 같다. 스릴러나 미스터리물을 좋아하게 되었고, 선역보다는 악역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취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레옹> 이후 게리 올드만은 한동안 어지간한 영화의 악역을 도맡아했다. <제 5원소>에서는 '절대 악'과 결합하며 지구를 파괴하려는 -_- 악당이었고, <에어 포스 원>에서는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탈취한 러시아인 테러리스트였다. 심지어 <한니발>에서는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악역으로 등장했다.
그러던 그도 이제 나이를 먹었는지,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해리의 대부인 시리우스 블랙 역을, 크리스토퍼 놀란의 손에서 새로 탄생한 <배트맨> 시리즈에서는 착한 형사의 상징인 제임스 고든 역을 맡는 등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곧 개봉 예정인 <쿵푸 팬더 2>에도 목소리 출연을 했다고 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뭔가에 '몰입'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가졌던 어떤 순수했던 시절의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와 함께 나이를 먹은 나는 확실히 전처럼 영화 자체에 푹 빠지는 일이 드물어졌다. 처음 <레옹>을 보고 열광하던 때의 내가 살았던 내 인생의 페이지는 이미 오래전에 넘어갔음을 느낀다.
아직까지도 저때 좋아했던 키아누 리브스와 게리 올드만 이상으로 좋아하는 배우가 생기지 않음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덧붙임.
'몰입'은 정말 어려운 주제였다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