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밀려온다, 쏴~ 아~”
초등학교 4학년 2학기로 기억한다. 석수(石手)라는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한 그가 꿈에서 다른 직업, 다른 위치에서의 삶을 살아보고, 꿈에서 깨어난 뒤 자신의 ‘주제’에 맞는 직업을 고른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다시 돌을 깎는다는 내용의 연극이 국어책에 실려 있었다. 요즘의 영악한 아이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겠지만, 새 학기를 맞아 책을 받으면 언제나 국어책의 맨 뒤에 실린 연극과 중간 중간 실린 소설을 먼저 읽으며 감동하곤 했던 그 당시의 내겐 꽤나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겨울방학이 되기 전엔 이 연극을 학교에서 하겠지? 그렇다면 꼭 이 석수의 역할을 해 보고 싶다.’ 라는 생각도 그 때 가지게 되었고.
내 뜻이 닿았는지, 아니면 그저 선생님이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열의로 가득 찬 학생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겨울방학이 끝나고 봄방학을 기다리던 즈음에서야 진도가 나간 그 연극에서 석수라는 역할이 내게 주어졌고, 워낙 시선 끌길 좋아했던 내게 딱 어울리는 발표 시간까지 가졌더랬다. 사실은 누가 했어도 큰 차이 없었을 것이었지만, 담임선생님은 물론이고 소문을 듣고 지켜보러 오신 옆 반 선생님들도 칭찬을 해 주신 덕분에 나는 ‘혹시 내가 이쪽에 재주가 있나’ 라는 치기어린 마음으로 짧은 목에 공구리라도 친 양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다녔더랬다.
용인으로 전학을 오고, 이전의 학교에서 했던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분명 있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특수 활동(CA)을 연극부로 골랐으나 초등학교의 CA가 대부분 그렇듯 별다른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이전 학교엔 없었던 강당이 있었고, 1년마다 한 번씩 CA의 발표회가 있었다는 것이 달랐다. 1년에 한 번씩 발표회를 하니 미리미리 대본도 뽑고 연습도 하는 충실한 CA를 기대했으나, 1학기는 놀고 2학기 가을부터 대본을 골라 2-3주 바짝 연습하고 발표하는, 이른 바 초치기에 가까운 발표회를 경험하게 될 줄은 정녕 몰랐다. 한 달을 남기고서야 발등에 불이 붙은 선생님은 ‘대사 없이 움직임으로만 내용을 전달하자’는 아이디어를 내셨고, 나를 포함해 '발표회'의 경험이 전혀 없던 아이들은 그저 ‘외울 것이 없어서 좋다’ 며 순진한 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1800명의 아이들이 모두 들어갈 수 있고 그 1800명 모두가 바닥에 앉을 수 있는 그 큰 강당에서 우리는, 최면효과가 있지 않을까 의심이 될 정도로 단조로운 ‘아기 코끼리 걸음마’를 근 30여 분 간 BGM으로 깔아놓은 상태에서 3주간 열심히 쌓아올린 연습의 결과를 혼신의 힘을 다 해 쏟아냈다. 공장의 매연 때문에 목이 아파 병원을 찾아온 동료를 부축해 입장해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의사선생님의 치료를 받아 동료가 건강해진 것에 기뻐하며, 공장 매연은 몸에 안 좋으니 조심하자는 내용의 포스터를 들고 퇴장하는 내 역할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면 꾹 참고 보아줄 만했겠지만 아무런 사전 설명이 없었기에 버라이어티에서 가끔 나오는 ‘몸으로 말해요’ 수준이었고, 결국 관객은 포스터에 적힌 문구를 보고서야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이해를 할 수 있는 실패작으로 남았다. 그나마도 준비한 포스터가 작아 강당에 모인 1800명 중 절반 정도만이 그 포스터를 제대로 읽을 수 있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겠다.
문제작이었던 연극이 마무리되어 단상에 모두 모여 인사를 할 적에, 옆에 계신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열심히 박수를 쳐주시던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1800명의 심드렁함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리던 그 박수소리는, ‘혹시 내가 이쪽에 재주가 있나’ 싶은 치기어린 마음에 다시 한 번 비수를 꽂았고, 난 곧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다른 이에게도 민폐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커다란 패배감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극을 하는 아이들은 자신만의 열정에, 구경을 하던 아이들은 각자 자기들만의 세계로, 선생님들은 또 그들만의 세계로 빠져들었기에 당연한 결과였겠다.
결국, 그 커다란 강당 안에서 우리의 연극을 통해 남은 것은 오직 BGM인 아기 코끼리 걸음마 뿐이었다. 심지어는 내 짝궁인 아이도 내가 무엇을 연기 했는지는 기억 못 했지만, 그 노래는 많은 아이들이 꽤 오랜 기간동안 흥얼거리며 다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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