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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01908 / 과일] 인생의 미로: 에일레스와 세 개의 난관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나조차도 몰랐으니까.

 

말 그대로 낼 모레면 마흔이 되어가는 나는 결혼도 안(못?) 하고 월세 원룸에서 하루하루 근근이 벌면서 비정규직의 위태로움 속에 살아가던 중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나도 알 수가 없다. 나는 쉬지 않고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내 노력이 뭔가 부족했던 것일까.

어쨌든 내 삶은 내 마음에 들게 돌아가주지는 않았고, 그 와중에 나는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가며 어떻게든 견뎠다. 덕분에 남들이 보기에 나는 호수 위의 우아한 백조까진 아니어도 인경호 위의 평온한 오리 정도는 됐다.

 

그리고 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백수가 된 것이다. (두둥)

 

엄격하게 말한다면,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아예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나는 비정규직이었고, 회사는 꽤 오랜 기간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고.. 나는 잘리기 전에 내가 그만둬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나름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었다. 사실 중간에 이력서도 두어번 내 봤다. 뭐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뭔가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은 이유는- 나는 그냥 이 현실 속에 안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괜찮을거야, 괜찮아질거야, 그냥 좀 참으면 나아질거야..

덕분에 나의 고용주가 나를 불러 앉히고 어렵게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조금 미소지었다. 재밌거나 좋아서가 아니라, 결국 이 상황에 맞닥뜨려버린 내가 조금 한심하고 우스워서.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Pan's Labyrinth, 2006)

관람객 9.15 (41) 기자·평론가8.00 (4) 
개요 판타지, 드라마 2006.11.30. 개봉 119분 미국 외 15세 관람가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 시민군은 산 속에 숨어 저항을 계속하고 정부군은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때에, 주인공 오필리아는 임신한 엄마와 함께 정부군인 새아버지 비달 대위가 주둔해있는 숲의 부대로 온다. 몸이 약한 엄마는 임신중독증으로 매우 건강이 나쁜 상태지만 냉혹하고 잔혹한 비달은 태어날 아기에게만 신경을 쓴다. 무서운 비달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던 오필리아는 어느 날 요정처럼 보이는 기이한 곤충을 따라 숲 속 미로로 들어가 그곳에서 '판'을 만난다. 판은 오필리아가 지하 왕국의 모안나 공주이며, 인간 세계에서 기억을 잃고 살고 있다고 말한다. 오필리아가 다시 지하 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보름달이 뜨기 전 세 가지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포일러 있음)

 

 

판은 오필리아에게 임무를 알려주는 선택의 책을 건네준다. 집에 돌아온 오필리아가 책을 펼치자, 아무것도 없는 백지였던 책에 저절로 그림과 글씨가 떠올라 오필리아의 임무를 알려준다.

 

 

 

 

 

오필리아의 임무의 내용은 정부군과 시민군의 싸움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성녀'가 된 오필리아의 자기희생적인 수행이기도 하다. 나는 늘 오필리아의 임무가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신적인 세계로 들어가려는 단계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의식주를 하나씩 버리는 것이 오필리아의 임무가 되니 말이다.

오필리아의 첫번째 임무는 괴물 두꺼비에게 마법의 돌을 먹이고 뱃속에 있는 황금 열쇠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오필리아는 커다란 나무 밑의 동굴로 들어가, 진흙과 벌레가 가득한 길을 기어서 임무를 수행한다. 임무를 마치느라고 오필리아는 엄마가 만들어준 예쁜 새 옷과 새 구두를 망치게 된다. 즉, 오필리아가 제일 처음 버리는 것은 옷이다.

옷은 사회적인 약속이다. 엄마는 오필리아가 그 예쁜 옷을 입고 새아버지인 비달이 손님들을 초대한 저녁 만찬에 오길 바랐지만 오필리아는 참석하지 못한다. 진흙을 잔뜩 묻히고 비까지 맞아 초췌해진 모습으로는 갈 수 없는 자리였던 것이다.

 

백수가 된다는 것의 두려움은 내가 내 주변에 내비친 것보다 사실 더 컸다. 내가 벌어서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인 내가 직장을 잃게 된다는 것은 엄청 겁나는 일이었다. 직장이란 사회적으로 내가 입어야 하는 옷이었다. 그런데 옷을 빼앗겨버린 거지.. 부모님한테도 말을 못 했다. 엄마, 나 회사 그만뒀어. 혹은 엄마, 나 회사 잘렸어. 그 어떤 것도 좋은 대사는 아니었다.. 나는 그냥 평온한 척을 가장했다. 평일 대낮에 돌아다니는 걸 보고 오늘 쉬세요? 라고 묻는 단골 마카롱집 사장님에게 태연하게 아! 일 그만뒀어요 ㅎㅎ 잘한건지 모르겠어요 ㅎㅎ 하면서 웃을 때 나의 허세에 스스로 조금 놀라기까지 했다..

 

 

 

 

 

오필리아의 두번째 임무는 분필로 문을 만들어 들어간 이공간(異空間)에서 잠든 괴물 옆의 문을 열어 마법의 검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라는 이 영화의 한글 부제는 틀렸다. 열쇠는 하나뿐이란 말이지..) 괴물 앞에는 온갖 산해진미들이 가득했지만 절대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는 단서가 붙어있었다. 즉, 오필리아가 이번 임무에서 버려야 하는 것은 음식이다.

불행히도 오필리아는 음식에 대한 욕구를 참지 못하고, 식탁 위의 포도알을 몇개 떼어 먹는다. (그 많은 음식중에 겨우 포도를 먹었다는 점에서 오필리아가 아직 어린 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욕심이 없어.. -ㅁ-) 그 순간 잠들었던 괴물이 깨어나고, 오필리아를 안내하던 요정들이 괴물을 막다가 잡아먹힌다. 오필리아는 간신히 괴물로부터 도망쳐 나오지만, 판은 오필리아가 임무 수행에 실패했다며 크게 화를 낸다.

 

나의 두번째 시련은 다시 취업을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나는 이제 나이가 꽤 많았고, 그것은 분명히 취업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이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했지만, 내 경력이 소위 말하는 '물경력'이 되어버린 것을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이력서를 꾸준히 내긴 냈지만, 연락은 거의 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취업하기까지 대충 세달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퇴직금으로 대충 버틸 수 있는 기간이 그 정도였다. 그보다 백수 기간이 길어지면...? 내 두려움은 그 이후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일단은 현재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던 중에 면접 제의가 왔다. 이때 진짜 쫌 기뻤다. 나는 아주 쌩 신입일 때 이후에는 일단 면접을 보면 전부 합격을 했던지라,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게 면접을 보고 돌아왔다. 그리고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다시 두려움이 생겼다. 나 어떻게 먹고 살지..

 

 

 

 

 

오필리아의 엄마는 아기를 낳다가 세상을 뜨고, 시민군과 내통하고 있던 비달의 의사와 하녀도 들통이 나서 의사는 죽고 하녀 메르세데스는 도망친다. 오필리아는 메르세데스와 함께 가려다 발각되어 방에 갇힌다. 이때 다시 판이 나타난다. 판은 오필리아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며 세번째 임무를 알려준다. 그것은 오필리아의 갓 태어난 동생, 아기를 데리고 숲의 미로로 가라는 것이었다. 오필리아는 비달 몰래 아기를 데리고 나오지만 곧 비달에게 추격당한다. 먼저 숲의 미로에 도착한 오필리아에게 판은 두번째 임무에서 가져온 칼을 내밀며 아기의 피가 필요하다며, 그래야 지하 왕국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지하 왕국으로 가지 못하더라도 아기를 다치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리고 그 순간 등 뒤에서 나타난 비달이 아기를 빼앗고, 오필리아를 총으로 쏜다.

오필리아가 세번째 임무에서 버리게 되는 것은 집이다. 비달의 집에서 나와 메르세데스와 같이 도망치려고 했고, 갇힌 방에서도 다시 도망쳐나와 미로로 온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음으로서 영혼의 집과 같은 인간의 육신도 버리게 된다. 그렇게 인간다움을 모두 버린 후에, 오필리아의 영혼은 지하왕국에 당도한다. 지하 왕국의 왕과 왕비가 모안나 공주의 귀환을 환영하고, 판이 나타나 임무 수행을 축하하며 정중한 인사를 한다. 백성들의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는 가운데 모안나 공주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나는 취업을 했다.

10월 1일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잘 된 일이긴 하다. 지난 면접의 쓰라린 충격이 가시기 전에 면접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고, 면접 다음날 오전에 바로 합격 통보를 받았다. 회사 규모는 조금 더 큰 곳이고, 정규직이고(!), 집에서 거리는 비슷하고, 급여는 그전보다 아주 살짝 높다.

하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은 이유가 뭐냐면.. 뒤늦게 찾아본 잡플래닛 평점 때문이다 ㅋㅋㅋㅋ 5점 만점에 1점이야.. -ㅁ- 내가 지금까지도 쓰레기같다고 욕하는 내 전전직장도 2점대였단 말이야..

과연 나는 무사히 그 회사를 잘 다닐 수 있을까? 또 내 몸과 영혼을 마구마구 바쳐야 하나?;;

나의 시련은 계속되는 것일까?

 

세상엔 정말 뭐 하나 쉬운게 없고, 내 앞길은 아직도 어두컴컴한 미로 속이다. 나이 마흔쯤 되면 세상살이가 좀 더 편해질 줄 알았는데 인생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같다.

언제쯤 모든 것이 좀 쉬워질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