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한 일이다. 영미 문화권 책 속 인물들의 이름은 금방 머리에 들어오고 잘 외워지는데, 그래서 배우들 이름도 곧잘 떠오르는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나라인 일본의 이름들은 너무 어렵고 생소해서 도저히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다. 책을 읽을 때 그런 증세는 더 심해져서 방금 읽었는데도 이게 누구였더라 싶어 되짚어 가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꽤 자주.
좀 웃긴 말일지 모르겠는데 그래서도 이 책이 좋았다. 여러 가지 의도에서 A,B라는 중심인물을 이름 대신 이니셜로 부르고 있어서 헷갈리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렇게 표현되지 않고 이름을 부여한 캐릭터들의 이름은 여전히 혼돈의 카오스였더라도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혼동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나는 책을 사서 소장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미친듯이 사 들이고 미친듯이 읽은 다음에는 책꽂이에 꽂아두고 흐뭇해한다.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도 서가에는 다 못 읽은 책들이 많으면서도 새 책을 또 사고 싶어서 기웃거린다. 하지만 도서정가제가 실시된 후로는 책 한 권을 사려고 해도 망설여져서 최근에는 도서관성애자가 되었다. (가장 친하게 지내는 동기가 이런 나를 일컬어 말한 적이 있다. 책변태가 도정제를 만나 도서관성애자가 연성되었군.)
이 책을 만난 것도 실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서가에 꽂힌 책들 중에 굳이 이렇게 자극적인 제목을 가진 걸 골라 꺼내온 사람도 내가 아니었다. 현이가 이걸 골랐다가 차마 다 읽지 못하고 무섭다며 내게 넘긴 걸 보면 이 자식은 특이하고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감성은 날 닮았는데 그걸 견디는 심지라든가 깡다구라든가 뭐 그런 건 날 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각설하고, 무서운 제목에 무서운 내용을 가진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다. 멀쩡히 등교한 아들이 시체가- 동급생에게 살해당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친구, 가 아니라 동급생이라고 말하는 건 살해 피의자와 피해자를 친구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리고 이 살인 사건으로 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엄마는 남아 있는 딸을 돌보지 않고 칩거한 채 산송장처럼 누워 있고, 아빠는 자신이 중심을 잡아야만 이 가정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고군분투고, 오빠를 잃은 여동생은 부모의 이런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한없이 겉돈다.
놀랍게도 이런 와중에 살인자는 일본의 이해 불가능한 법체계의 도움으로 무려 변호사로 성장한다. 피해자 가족에게 지급하기로 했던 피해 보상금은 제대로 정.산. 되지 않은지 오래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무엇보다 사람을 빡치게 하는건 이 새끼가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어떤 죄책감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직도 잊지 않았느냐,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느냐 하는 식의 대응. 대꾸. 뻔뻔함과 몰염치함.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벌어지는 게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에세이가 나오고 가족들이 기자의 인터뷰에 응해 이런 책이 나왔을 게 아닌가. 한 가정이 산산조각이 나서 복구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는 과정이 너무 생생하게 그려져서 몇 번이고 미간을 찡그리게 되는 한편, 이 글이 꾸며지지 않은 그대로의 사실을 옮겨두었다고 생각하면 토악질이 치밀어 오르곤 했다. 살인자와 그 가족의 행태, 피해자와 그 가족의 모습에서 세월호 사건을 떠올렸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시간이 흐르면 다 잊혀질 테니 참고 견디라는 무책임한 말들이 망자와 유족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사족: 고백하건대 가끔 살인을 꿈꾼다. 내 발밑에 무릎 꿇리고 목을 조르며 나를 공포에 차서 바라보는 눈길을 마주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한번에 고통 없이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무딘 칼로 온몸의 관절을 하나하나 썰어나가며 서서히 죽어가게 하고 싶은 인간이 세상에 존재한다. 다행히 실행에 옮기기에는 내가 너무 평범해서 그러지 못하고 있을 뿐이고, 이 정도 상상쯤이야 누구라도 하는 거 아닌가 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을 뿐이지. ... 니들은 안 그러냐? (그리고 몇 년 후 이 글이 신문 지상을 장식하는데...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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