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베개를 내어주고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중, 같이 천장을 보고 있다 몸을 돌려 내 품으로 안겨들은 Y가 내 귀에 속삭였다.
"오빠, 우리 도망갈까?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살자."
좁고 후덥지근한 방 탓이었을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간 구석에 밀어둔 채 방치하던 오만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감과 동시에, 자연스레 새어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삼키느라 애를 썼었다.
온라인으로 알게된 두 명, 얼굴 한 번 못 보고 통화 딱 두 번 해 본 그 두 명과 함께 살겠노라며 용인에서 대구까지 짐을 싸고 내려왔던 그 때. 노랗게 물들인 칼머리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며 다니던 그 때의 난 몸만 어른이었지 머리는 완벽하게 애였던 스물 한 살이었다. 밤에 일하는 두 지인을 보내고 낯선 동네의 낯선 방에 혼자 누워 있던 첫 날 밤의 심란함은 아직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후 그 낯선 동네의 낯선 방엔 나와 Y가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낸, 이른 바 폭풍의 시기이기도 했다.
시작은 분명 나보단 Y쪽의 마음이 더 깊었으리라 생각한다. 윗쪽에서 살다온, Y가 평소에 만나는 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느낌의 사람에 관한 호기심이었든 덩치만 컸지 하는 행동은 애인 녀석에 대한 보호본능이었든. 혹은 그저 날 만나기 얼마 전 이별했던 상처를 다른 사람으로 메우고 싶었을지도 모르겠고. 다만 확실한 것은, 어떠한 이유로든간에 그녀는 과분할 정도로 내게 마음을 써주었다는 점이다. 일을 하고 있던 와중에도 최대한 시간을 내주어 함께 하려 노력했고, 둘만의 데이트보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모임이 훨씬 잦았음에도 싫은 소리 없이 꼭꼭 참석하려 애를 써주기도 했거니와, 타지 생활로 인해 텅 빈 내 주머니 사정에도 많은 신경을 써 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 때의 난 너무나 어렸기에 그저 'Y만큼 예쁜 여자가 왜 나랑 사귈까?' 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고, 그래서 받는 만큼 돌려주고 싶은 마음보다 그저 받을 수 있을 때 많이 받아 두자는 마음만이 앞서있었다. 그랬기에 나를 향해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 했고,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오로지 상대방의 체온으로만 달래려 했다. 이것 또한 사랑이라고 스스로 되뇌이면서. 하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난, 주위에서 들려오는 '내가 알기 전의 Y에 관한 이야기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수 있었다.
비록 내게 들려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날 만나기 얼마 전에 있던 일들이었다 하더라도, 난 날 만나기 전 Y에게 어떤 일이 있었든 누구와 만났든 무슨 행동을 했든 중요하지 않다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겐 참말 과분할 정도로 예쁜 여자가 현재 나랑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었고, 난 그저 내겐 과분할 정도로 예쁜 여자가 나와 함께 하는 동안에도 구설수에 휘말려 마음 고생을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악의는 없었지만 툭툭 던지는 표현이 많아 오해를 자주 사곤 했던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전에 만났던 사람과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엔 더더욱 예민할 수 밖에 없던 Y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귀를 닫거나 혹은 활짝 열어 흘러가게 두는 것, 그리고 아무 말도 않는 것이라 생각했었고 또 그렇게 행동했었다. 다행스럽게도 들려오는 소문과 달리 Y와 함께 보낸 밤과 낮은 풋풋함과 더불어 약간의 어색함, 거기에 애정 표현에 있어 초보스럽게 거칠은 부분을 여기저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에, 난 나와 Y의 주변을 떠돌던 각종 루머에 온전히 신경을 끄고 오직 내 눈 앞에 보이는 Y에게만 충실할 수 있었다.
내 생각과 의도를 좋게 받아들였는지, Y와 나의 연애는 다른 이들이 내게 말하고 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동안 유지되었다. 서로의 옆자리에 서로가 누워있는 것이 당연하고 또 '이 상황에선 이런 말을 하겠지' 라는 예측도 그럭저럭 맞아 떨어질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즈음, 난 Y에게서 이 글의 맨 앞머리에 쓰인 것과 같은, 전혀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난 과연 이 제의가 그저 충동적으로 꺼낸 얘기인지에서부터 만약 제의를 받아들였을 시 우리가 준비해야 많은 부분 - 심지어 이렇게 도망을 가서 살게 되면 과연 컵은 몇 개를 사야 할지 등등 - 에 대한 고민을 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주마등을 보듯 너무나도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생각을 했지만 도통 나오지 않는 결론에 그저 마른 침만 꼴깍 넘긴 후, 결국 많은 남자들이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가장 보편적으로 보일 반응 - 즉, 웃어 넘기는 것 - 을 Y에게 선사했고, Y와 나는 그렇게 머쓱한 웃음을 나누며 다시 서로를 끌어안았었다. 그간 나를 만나며 무리한 부탁이나 자신의 고민에 관한 내용을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었던 Y가 내게 처음으로 속내를 날것으로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한 쪽만의 give, 한 쪽만의 take로 이루어지던 나와 Y의 반쪽 관계는 한 계기를 통해 전환점을 맞이했다. 한 걸음 더 다가설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받기만 하던 내가 마침내 껍질을 깨고 그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 쪽만의 give, 한 쪽만의 take로 이루어지던 관계 자체는 변할 수가 없었는데, 바로 그녀가 조금씩 내게 마음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동안 문을 두드리다 지쳐버린 그녀와 뒤늦게 문을 열었지만 두드리던 이는 이미 떠났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의 어긋남은, 연애를 유지하는 것에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난 그 상황을 이해할 순 있었지만, 그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랬기에 망령처럼 Y의 주위를 맴돌며 다시 마음을 돌리려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하지만 그 노력은 부메랑이 되어 우리를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갔고, 결국 찾아온 이별을 극복하지 못했다. 두어 달간의 끊임없는 자기 비하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난 조금씩 Y를 잊어갔다. 아니, Y를 잊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그 때 그녀가 말했던 제의에 관한 내용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가족의 반대에도 꿋꿋이 날 만나오고 있었지만 그로 인한 감정의 골이 극에 치달아 결국 큰 언쟁을 하고 도망치듯 날 찾아온 날이 바로 그 날이었고, 기대고픈 마음으로 찾아온 난 여전히 한결같은 무심함 - 수많은 반대를 무릎쓰고 내 마음을 열려 애썼으나 여전히 제대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음을 Y는 그렇게 표현했다 한다 - 으로 자신을 대했으며,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내딛은 한 걸음 역시 그렇게 웃음으로 넘어가는 것에 좌절했노라는 것을. 또, 비록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제의가 그 당시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내게 건넨 제의는 사실 그 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는 상관 없이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었고, 만약 나만 OK 했더라면 분명 그렇게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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