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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01108 / 공포] 제일 무서운 것 by 에일레스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한때 블로그와 싸이를 강타했던 100문 100답의 질문 어딘가에는 꼭 저런 것이 들어있곤 했다.
나는 여기에 늘 이렇게 썼다.
'벌레'
그렇다. 나는 벌레를 무서워한다.
다리가 4개보다 많은 종류의, 기거나 날거나 하는 모든 종류의.
솔직히 곤충이나 벌레나 나한테는 다 그게 그거다.
며칠 전에는 저녁 뉴스에서 도심에 매미가 소음공해를 일으킨다며 매미를 확대해서 촬영하고 배 부분을 보여줬는데 그걸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다 -_-;;;;

내가 언제부터 벌레를 무서워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벌레를 무서워하기 보다는 '싫어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은 하는데-
아무튼 벌레가 나타나면 으악! 하고 움츠러든다.
얼마 전 서산으로 같이 놀러갔다 온 친한 언니들이 내게 말했다.
"너는 벌레 무서워해서 시골에서는 못 살겠다."
... 정답입니다. -ㅅ-

가장 무서워하는 것을 보는 순간은, 그 사람이 가장 약해지는 순간일 것이다.
영화 같은 것에서 곧잘 나오지 않는가. 막강한 적이 나타났을 때 계속 당하다가, 그 적의 약점 또는 그 적이 두려워하는 뭔가를 들이대면 적이 벌벌 떨다가 자멸하는 것이다. 영화 <피터팬>에서 네버랜드의 아이들이 후크 선장에게 시계 소리를 내면서 그를 조롱하고 겁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 '가장 무서운 것'을 마주 대하고 싶어질 때는 언제일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감독 이누도 잇신 (2003 / 일본)
출연 츠마부키 사토시,이케와키 치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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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한국에 알려진 가장 유명한 일본 영화 중 하나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츠네오라는 평범한 청년이 다리가 불편한 여주인공 조제를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조제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며, 다리가 불편한 탓에 유모차를 타야만 외출할 수 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탓에 할머니가 주워다 준 책을 읽으며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녀의 이름인 '조제'는 그녀가 좋아하는 책의 주인공 이름이다.

영화 속에서 조제가 무서워하는 것은 다름아닌 호랑이였다.
그녀는 츠네오와 연인이 되자 곧 호랑이를 보러 간다.

 

 

 

 

 

 

 

 

 

 

 

 

 

 

 

 

 

 


그녀는 왜 호랑이를 보고 싶었을까?

몇년 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가장 단순한 해석을 했었다.
'옆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 있다면 무서운 것이 조금 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데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이런 저런 다른 해석을 시도해봤다.

첫번째는, 앞서 말했듯이, 무서운 것과 마주한 순간이 그 사람이 가장 약한 모습을 가지게 되는 때라는 것이다.
조제는 츠네오에게 자신의 '약한' 내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츠네오와의 첫 만남에서 조제는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식칼을 휘두른다. 그 이후로도 츠네오에게 자신은 불편하지 않다는 듯한 모습을 계속 보여왔다. 할머니의 죽음 후 츠네오가 다시 찾아왔을 때도 혼자 잘 살수 있는 척을 한다.(물론 나중엔 가지말라고 하고.. 그래서 역사가 이루어지지만. -ㅅ-)
사회에서 동떨어져 혼자만의 세계에서 살던 조제는 항상 강한 척을 하고 살아야했지만, 이제 강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조제는 츠네오에게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노출함으로서 그에게 솔직하게 자신을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는 의미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두번째는, 사실 앞의 해석이랑 비슷하긴 한데, 호랑이가 조제의 현실적 자아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에 들어있는 '조제', '호랑이', '물고기'는 모두 조제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조제'.
본명이 '쿠미코'인 그녀는 프랑소와즈 사강의 책 [한달 뒤 일년 후](영화 속에서는 [일년 뒤]라고 나온다)를 읽고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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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 다시 고독해질거야..
모든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네,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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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제'라는 것은 쿠미코(조제)가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투영한 자아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또 누군가에게서 사랑받고 있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마침내 츠네오가 나타났고, 그는 유일하게 그녀를 진짜 '조제'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은 '호랑이'.
앞에서 말했듯, 호랑이는 조제의 현실적 자아라고 생각했다. 호랑이는 강하고, 아름답고, 누구에게나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그러나 호랑이는 우리에 갇혀있다. 호랑이는 튼튼한 다리로 넓은 땅을 뛰어다닐 수 없다. 마치 조제처럼. 동물원 우리 안에 있는 호랑이를 조제는 자신의 현실과 동일시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현실을 마주보기 싫었던 조제는 그래서 호랑이를 두려워했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자 자신의 현실을 똑바로 쳐다 볼 용기가 생겼던 것이다. 현실을 견딜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물고기'.
이것은 조제의 내면을 상징한다고 봤다. 조제 스스로가 인지하는 본인의 내면. 조제는 츠네오에게 자신은 어둡고 깊은 바다 속에서 왔다고 말한다. 조제가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름을 알 수 없는 기다란 물고기가 공중을 헤엄치는 영상마저 떠있다. 빛도 소리도 아무것도 없고, 조용히 시간만 흐르던 그 심연에서 헤엄쳐 나와 츠네오를 만난 조제는, 츠네오가 떠난 다음 다시 그 외로움의 바다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이미 하고 있는 상태다.



어쨌거나 조제는, 츠네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보여줬다. 시간이 지나고, 사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끝을 맺었고, 그들은 다시 고독해졌다. 그냥 그렇게 지나간 시간만이 있을 뿐.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조제는 담담하게 다시 하루를 산다.

예전에 알던 언니가, 자신의 남자친구-스물 다섯살 쯤이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언니가 한결같이 좋아하던 사람이었다-에 대해 말하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정말 후회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모두 다 했기 때문에, 헤어져도 아무런 여한이 없다고. 조제를 보면서 나는 그 언니가 했던 그 말을 떠올렸었다.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보면서도 또 다시 그 말을 떠올렸다..
그렇다. 후회없는 사랑.


자 그러면,
나는 벌레를 누구와 함께 마주하고 싶을까.

.
.
.

답이 있을 리가 있나 -_-
벌레는 혼자 있든 여럿이 있든 싫은 것은 마찬가지다 -_-
벌레를 잘 잡아주는 사람이랑 결혼하겠다는 내 친구도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내가 나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을 만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한 것 같다.
사실 과연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한 의심이 더 강하게 드는 요즈음이다..
그냥, 돈 많이 벌어서, 세스x 회원(?)으로 벌레 없이 사는 것이 내게 더 바람직한 미래가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해본다.

휴.
오늘 밤도 날벌레 한마리가 모니터 앞을 스치운다...

(아니 뭐 이런 괴상한 결말이 다있어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