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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01108 / 공포] 수면중에 일어나는 일련의 부정적, 시각적 심상. by 란테곰

따뜻한 방 안. 평소 침대를 쓰지 않는 내가 바닥의 푹신함을 통해 전해져오는 이질감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땐,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내 얼굴을 직격으로 때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너무나도 낯설은 곳에 놓인 사람이 일반적으로 반응할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대신 '아... 또 여기구나' 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 이유는 아마 그간 너무나도 자주 겪어온 낯익은 방이었기 때문이리라. 무엇을 숨기랴, 지금 갓 잠에서 깬 내가 바라보고 있던 방은, 늘 그렇듯 벽지만이 다를 뿐이지 구조 자체가 완벽하게 동일한 것을. 또 늘(?) 그렇듯 내 옆에 아가씨가 있다는 것까지도 같거늘.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과연 이 아가씨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나 있을지... 싶은 상황에서도 한 가지 확실하게 떠올랐던 것은, 꿈이든 리얼 라이프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현 상황과는 무척이나 동떨어진 다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다짐을 할만도 한 것이, 내 옆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너무나도 기분 좋은 몸내음을 지닌 아가씨가 누워 자고 있고, 이 방엔 나와 이 아가씨 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난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라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랬기에 난 아무런 내적 갈등 없이 그 아가씨를 뒤에서 꼬옥 끌어안고선 머리를 스윽 쓰다듬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는 호기를 부릴 수 있었다. 사실 머리를 매만져주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일지 궁금해하는 마음이 훨씬 많은 지분을 차지했기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행했다 봐도 무방하겠다. 다만, 일련의 행동을 통해 내 곁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던 아가씨는 사실 무척이나 친숙하고 또한 낯익은 얼굴을 가진 아가씨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그저 내 지나친 호기심을 자책함과 동시에 꿈의 비정함을 탓하느라 바빴지만. 


베이스라인이 무척이나 간지나던 노래의 가사를 빌어 설명하자면, 그녀는 너무 예뻤고, 그래서 나는 슬펐었다. 특히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도 환히 빛나 세상의 모든 것을 지워버릴 듯한 밝음을 지녔었는데, 그것 하나만으로도 내 마음을 흔들 수 있던 사람이었다. 하긴, 워낙에 웃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있어서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싶긴 하지만 그 중에도 손을 꼽아서 세면 단연 엄지손가락으로 셀 사람인지라 가슴이 쓰릴 수밖에 없는데. 여튼, 이미 낯선 곳에서 잠을 깼다는 사실을 잊은 채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이 꿈을 가장한 신의 장난이 아닐까 걱정하다 스스로 얼굴을 꼬집어보기도 했을 정도로 낯익은 얼굴을 가진 아가씨가 내 옆에 있어서 무척이나 놀랬더랬다. 게다가 그 아가씨가 지금 여기, 내 옆자리에서 맨 어깨를 드러내고 누워 있는 것은 사실상 말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본 덕분에 지금 이 상황이 100% 꿈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꿈인데 뭐 어때라는 생각까지도 할 수 있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꿈이라는 면죄부를 등에 업고 한껏 당당해진 나는 거침없이 행동했고, 적절한 반응을 보이며 받아쳐오는 그 아가씨에게 고마워하며 나누는, 이미 해가 떠올라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볕이 등을 간지럽히는 상황에서의 짙디짙은 페팅은 시각적으로나 촉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매우 충만한 느낌이었다. 굳이 여기서 진도를 더 뽑을(?) 필요가 있을지를 고민하게 될 정도로. 잘은 모르겠지만 그 아가씨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는 모양인지 우리는 얽혀있되 얽혀있지 않은 그 단계에서 계속 서로의 몸을 물고빨고핥고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때였다. 마치 싸구려 에로영화에서의 베드신마냥 우리의 침대 위로 BGM이 깔리기 시작한 것은. 어차피 꿈이니 BGM도 깔릴 수 있다 생각했으나, 그 곡이 문제였다. 세상 어떤 영화의 베드신에 Little Susie가, 그것도 오르골 소리를 따라 흥얼거리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부분이 쓰인단 말인가. 지금의 행복함과는, 따뜻함과는, 충만함과는 완전히 반대에 가까운 노래가 갑자기 들려와 기분이 영 찜찜해진 나는 그 아가씨의 몸에 붙어있던 입술을 떼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기, 혹시 지금 노래 들려?" 

"응... 근데 이게 무슨 노래야? 완전 음산하네." 

"그러게. 아... 좀 짜증난다. 아무리 꿈이래도 이건 너무한데." 


순간, 눈에서 번개가 침과 동시에 시익. 하는 소리가 들린 직후, 내 오른쪽 목에서부터 터져 나온 새빨간 분수는 안개가 되어 나와 얽혀있던 아가씨의 몸을, 새하얀 시트가 깔려있던 침대와 베개를, 급기야는 햇살이 들어오던 창문까지도 뒤덮고는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며 오른손으로 피가 솟구치는 목을 덮었으나, 뜨뜻미지근한 핏줄기는 손 사이의 틈을 찾아 무심히, 그리고 거침없이 흘러내리기에 바빴다. 순식간에 호흡이 가빠짐을 느낌과 동시에 천근만근 무거워진 눈꺼풀을 이겨내지 못하고 조금씩 게슴츠레해지던 내 눈엔, 피비를 뒤집어쓴 채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내 목을 그은 칼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는 것도 지쳐버렸을 때, 그녀가 내 귓언저리에 속삭였다. 


"이제, 안 들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