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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01107 / 여름] 먹지 마세요. 상상력에 양보하세요. .... 응? by 김교주

된장을 뚝 떠다가 거르지 말고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마늘 다진 것, 대파 숭덩숭덩 썬 것과 함께 고루 버무리고 나서 쌀뜨물 받아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풋고추 썬 것을 거의 된장과 같은 양으로 듬뿍 넣고 또 한소끔 끓이면 되직해진다.



 
요리책의 일부가 아니다. 올 한해, 이 팀블로그의 도서/문학 파트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박완서 선생의 산문집 <호미> 에 실린 음식 이야기의 일부분이다.(이 글은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이라는 책에도 실려 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저 레서피는 여름의 별미인 호박잎쌈과 강된장을 위한 것이다. 


호미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박완서 (열림원,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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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수없는밥한그릇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고경일 (한길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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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적게는 너댓권, 많게는 열 너댓권의 책을 읽으며 내가 세우는 기준이 하나 있다면 작가의 신변잡기 따위가 담긴 에세이집은 최대한 피한다는 점이다. 역사, 문학, 미술, 심지어 해양학과 지구 과학을 다룬 책까지를 기꺼운 마음으로 읽으면서도 어쩐지 수필집에는 손이 가질 않는다. 그런데도 이 책을 사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지가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라고는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호미>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경로를 기억하지 못한다. 만일 <호미>가 내 지갑을 열어 사들인 책이라면 분명 박완서 선생의 산문집이었기 때문이리라.)

여름, 이라는 주제를 처음 받았을 때는 <배반의 여름>을 소개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제목이 큰 영향을 미쳤을 법한데 막상 다시 읽은 <배반의 여름>은 여름을 다뤘다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있었을 뿐더러 도저히 글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난감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도저히 여름 이야기일 것 같지 않은 에세이집에 손이 갔고, 거기에서 저 레서피를 재삼 발견해 냈을 때의 기꺼움이란. 

싱싱하고 여린 호박잎을 따다가 줄기의 질긴 부분을 다듬어 내고, 밥통이든 찜통이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그릇에 쪄낸 다음, 위에 적힌 요리법을 따른 강된장을 곁들여서 현미밥을 얹고, 쌈을 싸서 한 입.....


박완서 선생의 글쓰기가 가지는 매력은 언어의 풍요로움과 생활에의 밀착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집에서 흔히 드러나는 차갑고 깐깐한 이미지는 에세이라고 해서 덜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매서워지고 있다는 느낌까지 준다. 
그럼에도 이 에세이집, 그 중에서도 이 호박잎, 강된장 이야기에 이르면 선생의 칼바람 같은 필체가 누그러지고 덜 뾰족해져서 둥글둥글 마모된 부분이 생긴 것이 눈에 띈다. 선생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버린 서글하고도 주름 가득한 눈에 웃음을 가득 담고  호박잎을 다듬고 강된장을 끓이는 모습이 눈 앞에 선연히 떠오른다.
저토록 단순한 요리 한 가지를 소개하면서도 그녀의 입담은 조금도 무뎌짐이 없고, 당장에라도 장독대로 달려가 오늘 저녁에는 강된장을 끓여보리라 결심하게 만드는 묘한 구석이 있다. 

<호미>를 택하는 사람이라면  선생의 노년을 따뜻한 감성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강된장에 매혹될 것이고, <잊지 못할 밥 한 그릇>을 택하는 사람이라면 이 짧은 여름밤 독서삼매에 빠져 있다가, 불현듯 책을 집어 던지고 야식을 찾아 헤매게 될지어다. 



덧: 글을 쓰는 내내 배고파서 혼났다는 건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