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준비라는 사막 가운데 홀로 버려져 낡아빠진 사전과 문제집들 틈에서 지겨운 싸움을 해나가던 내게 그가 나타났다.
"뭐가 그렇게 힘든거야? 네 짐 같은 건 내려놓고, 내 어깨에 기대. 대신 내겐 정착할 수 있고 마음 둘 수 있는 자리 하나만 내주면 돼."
그는 마치, 철새의 이동을 따라 길을 나선 여행자 같았다.
세상의 어수선함에 때묻지 않고, 사람의 배신에 익숙하지 않으며, 숫자놀음에 그악스럽지 못하고, 언제나 어디에서나 자기 꿈을 큰 소리로 말하는 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 부족한 데도 많고 멍청한 구석도 많아서 늘상 누구에겐가 속고 돌아와서는 멋적게 뒤통수를 긁적이는.
바싹 마른 몸에, 안스럽게 구부정한 어깨. 새까만 머리칼만큼 까만 눈동자. 손을 내밀면 지금도 그의 커다란 웃음 소리가 만져질 것 같다.
다 큰 어른인 것처럼 굴다가도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서 엉엉 울어버리는 바람에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하지만 삶의 많은 순간에 자신이 나를 길들인(거의 길들인... 적어도 관계를 맺은) 데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던 남자.
첫 만남에서부터 이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10년이 어린 왕자와 장미의 그것과 같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나를 생 떽쥐베리나 여우에 대입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린 왕자의 자리에 그를 두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마저 든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나는 그를 어린 왕자의 틀에 가둬 두고 있었다.
10년 3개월이었다. 내 삶의 3분지 일이고, 그가 누린 인생의 25%에 달하는 시간.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지겹도록 넓은 사막을 함께 걸었고, 몇 개의 오아시스를 같이 찾아내어 그 달콤한 생명수를 나눴고, 두 사람만의 양을 길렀으며, 숱하게 많은 바오밥 나무의 싹을 골라냈다. 그리고 그가 떠났다. 소리 없이 아주 빠르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마치 그 날 그 시간에 그렇게 떠나도록 원래 약속이라도 되어있던 사람처럼.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나는 정확히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고, 언젠가는 그가 소설 속의 어린 왕자처럼 내게 돌아오리라는 믿음 대신 절대로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가져야 했다. 나는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있으니까, 내가 살아나가야 할 이 세상은 판타지가 지배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가 그렇게 떠나던 날 나는 어린 왕자로부터 기꺼이 그를 놓아주었다.
조금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의 어린 왕자가 될 사람이 그가 아님을 인정한 셈이었다. 역시, 나의 삶은 팬터지가 아니니까.
"잘 자. 미안하고, 사랑해."
"응, 나도."
마지막으로 나눈 육성의 대화를 다시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낸다. 뒷모습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에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으면 좋았을 걸 후회해도 지금은 너무 늦었다. 하지만 그래도 알아주었으리라 믿는 것은, 최소한 그 순간만큼은 그는 분명 나의 어린 왕자였으니까. 환타지 속 왕자님이었으니까. 분명히 퉁명스레 내뱉은 말 뒤에 숨겨진 애정을 알아주었으리라고.
하루라도 빨리 이 글을 끝내고 싶었다. 어떤 짜임으로 어떻게 써나가야 할지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키보드를 두들기다 여기까지 왔다.
사랑했노라고. 고마웠노라고. 우리가 함께 기르던 양은 여전히 덩치를 키워가며 잘 자라고 있다고. 나는 이제 더는 어린 왕자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날 거라 믿지 않지만, 대신 이 사막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를 배워가는 중이라고. 그러기로 했다고. 주절주절, 고백하고 또 고백하면서.
2012년 9월 19일, 그의 3주기를 앞두고.
이 글을 이제는 고인이 된 안기준 님에게 드립니다.
'2012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09 / Fantasy] 여유. by 란테곰 (0) | 2012.09.30 |
---|---|
[201209 / Fantasy] 환상의 세계 by 에일레스 (0) | 2012.09.30 |
[201208 / 바람] 어렸을 때의 바람 by 에일레스 (0) | 2012.08.31 |
[201208 / 바람] 갚을랬쑤유. by 란테곰 (0) | 2012.08.30 |
[201208 / 바람] 네게로 불어오는 바람은 네 힘으로 이겨내야 하는 거였어. by 김교주 (0) | 2012.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