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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01208 / 바람] 갚을랬쑤유. by 란테곰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그 땐 좀 그랬어. 그동안 형이 애인 있는 사람들 몇 번 만난 거야 알지만, 이번엔 좀... 진짜 미쳤나? 싶더라고."


쨍. 맑고 짧게 울리는 잔끼리의 부딪힘에서 난 소리가 흥을 돋운 듯 그 녀석은 잔을 바로 비워버리고는 소주병을 잡았다.


"그래서 그 땐 되게 불편했었거든. 근데, 이제 와서 생각을 해 보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어."


내 빈 잔에 쪼르륵 술을 채우고는 자신의 빈 잔을 내민 이 녀석을 알게 된 것이 벌써 10년 째가 되었다. 그 때의 내 사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임과 동시에, 지금 꺼낸 이야기처럼 좀처럼 말하기 어려운 것들도 곧잘 솔직하게 얘기를 하는 녀석. 그런 녀석의 악의 없는 얘기에 난 형이지만 미쳤다 생각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화가 나지 않았고, 소리 없이 웃으며 녀석의 빈 잔을 다시 채워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런 얘긴 그간 꽤 들었던 얘기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많은 얘길 안 해줘서 잘 모르겠지만, 전화도 왔었다며. 난 그 얘기 듣고 형 칼맞는거 아닌가 걱정도 했었다고."


얘길 듣자마자 조건반사에 가까울 속도로 떠오르는, '우리, 이성적으로 삽시다' 라는 한 남자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또 담담했었다. 결코 좋다 할 수 없는 기억인지라 오랜만에 떠올렸음에도 머리가 복잡해져 금방 생각하길 포기하고 잔을 들어 입 안에 털어넣었다. 앞엣 녀석은 얘기를 듣고 싶어 몸이 달았는지 덩달아 잔을 비우고는 내 잔을 바로 채우며 말했다.


"이젠 좀 속 시원하게 얘기 해줘봐. 다 지난 일이잖아."


술잔을 그렁그렁하게 채운 소주를 바라보며 과연 어찌 얘길 해줘야 할지 고민하다 행여 넘칠까 소주잔을 조심조심히 들어 입안에 털어넣어 보았지만, 술잔이 꽤 돌았기 때문인지 도통 답이 나오질 않았다. 뭐, 얘기를 하다보면 알아서 정리가 될테니 찬찬히 얘기해보자 마음 먹고는 계속 대답을 기다리며 멀뚱하게 앉았는 녀석의 잔을 채워준 뒤 지난 일을 처음부터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전에 얘기 했지? 그래. 정말 우연히 알게 된거지. 뭐 보통 인터넷에서 생기는 인연이라는게 뻔하잖아. 사실 그 전에도 직접 얘기를 나누지를 않았을 뿐이지 어떤 생각을 어떻게 얘기하는지 또 누구누구와 친한지 정도는 굳이 친구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어. 근데, 말 할 적에 단어 고르는 거 하며,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것 하며... 눈에 확 띄더라고. 그래서 관심은 갖고 있었어. 야, 이 사람 말 참 잘한다. 배울 거 많다. 한 번 직접 봤음 좋겠네 정도? 여튼, 그렇게 그렇게 조금씩 친해졌어. 그러다가 만나게 된 거야. 아, 단둘이 만난 건 아니고, 번개 비스무리하게 해서 예닐곱명 모일 적에. 나야 그 땐 공익 하고 있을 때니까 돈이 없었을 뿐이지 시간은 많았고, 용인에선 할 게 아무것도 없어서 심심했거든.


난, 사람들을 만나서 뭘 어떻게 해봐야겠다 같은 건 애초에 생각도 못 했어. 내 생김이 워낙 그렇고 그런데다, 또 그 친구 상대로는 그럴 수도 없었고... 더군다나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그 상황에서 하긴 뭘 해. 그냥, 좀 더 친해졌음 싶었지.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의 대부분을 잘 알고 있고 또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 되게 고맙고 좋잖아. 게다가 생각이 맞는 부분도 많았어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니 오래 알았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였지.

근데... 
음. 난 그 때 처음 알았어. 내가 그, 눈이 가늘게 되면서 활짝 웃는 표정. 그거에 약하다는거. 그리고 그렇게 웃는 사람에게도 약하다는거. 내 모니터 바탕화면도 봤으니 내가 그런 거 좋아하는 건 알 거 아냐. 근데 그걸 눈 앞에서 직접 본 느낌. 누군가가 내 눈 앞에서 그렇게 웃으면 정말로 마음이 혹하는구나- 라고 처음 느꼈어. 솔직히 그 동안 내가 모임 좀 많이 쫓아다니고 또 좀 많은 사람들 만났냐. 그러면서 진짜 희한할 정도로 이쁜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또 그런 사람들이 웃는 것도 정말 많이 봤다고. 근데, 처음이었어. 그 사람 얼굴 뿐만이 아니라 주위가 환해지더라 진짜. 완전 신기했어. 


아, 얘기가 좀 샜네. 여튼 그렇게 한 번 보고, 또 이러저러해서 두어번 보는 동안 꽤 친해진거야. 그 땐 내가 워낙 저녁밥상 메뉴 고민이며 청소에 설거지에 주부스러운 얘기를 많이 했었고, 그 친구야 그게 일상일 수 밖에 없었으니 사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겹치는 부분이 꽤 있었거든. 그러다보니 점점 친해지고, 간간히 속내 얘기도 조금씩 하게 되고. 응. 그랬어. 연락처를 주고 받아서 간간히 문자도 보내게 되고.




그러다가... 그동안 번개 비스무리하게 해서 볼 적엔 대충 중간 거리 즈음 되는 종로에서 봤었는데, 내가 한 번 그 친구 집 근처까지 간 적이 있어. 그 친구가 그 때 정말 많이 힘들어해서 좀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에. 그래서, 우울하고 답답할 땐 노래 부르는게 최고라고 뽐뿌질을 해서 노래방에서 맥주 좀 갖다놓고 마시면서 노래 부르고 놀았어. 그렇게 노래 부르다가- 술 마시며 놀다가- 우는거 다독이다가- 또 노래부르다가- 다독이다가 안아주다가- 또 노래하다가- 백허그하고 있던 중에 입맞추다가- 또 술 마시다 놀다가. 그렇게 된거야. 


중간에 이상한 게 좀 끼어있다고 생각하진 말자. 네가 궁금해했던 건 내 연애사지 내 키스사나 섹스사가 아니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튼, 돌아가는 길에 생각해봤지. 내가 숨기고 있던 마음도, 그 친구가 누르고 있던 마음도 터졌어. 한 번 드러낸 마음 다시 집어넣기가 어디 쉽겠어? 쏟은 물 주워담기지. 게다가 서로 쏟은 물을 주워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뒤로도 계속 만나게 된거야.


왜 보통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과 좀 더 많은 걸 함께 하고 싶어하잖아. 밥이 됐든, 술이 됐든, 여행이 됐든. 그런데 난 조금 달랐거든. 물론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 때 공익이던 내가 경제력이 있길 했나, 그렇다고 또 미래가 있길 했나. 더군다나 애초에 경제력이 있고 없고의 문제도 아녔고. 그리고, 내가 만약 그걸 원하고 좇게 되면 상대방의 생활은 아예 파탄이 나거나 문제를 불러 일으키게 될텐데, 그러고 싶진 않았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냥 지금 이 상황, 각자 자기 할 일하고 자기 살아가는 와중에 이렇게 보고, 또 얘기하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그렇게 된 첫 날 돌아오면서, 딱 그것까지를 바라기로 했어.




솔직히 어디 가서 막 자랑스럽게 얘기할 거리는 아니지만, 굳이 숨기고 싶지도 않았어. 단지, 일부러 여기저기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또 내가 누구 만난다고 여기저기 소문내는 타입은 아니니 내 주변 사람들 중 아는 사람이 많질 않은거지. 그나마도 다 지나고 나서 들은 사람이 태반이고. 하지만 그 때도 내 얘길 들은 사람들, 어떻게 어떻게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너랑 비슷하게 반응했어. 미친 놈. 또라이 새끼 같은거. 근데 난, 지금 생각해봐도 좀 이상할 정도로 뻔뻔했다 해얄까. 귀를 막았다는 표현이 어울릴까. 그랬어. 응, 남들이 하면 불륜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생각을 했던거지. 생각이 짧았던 게 맞아. 


근데, 조금씩 내 욕심이 더해지고 더해지다가. 응, 그러다가... 그 전화를 받았던거야. 그 친구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통화라기보단 통보에 가까운 전화가 끊기고 제일 걱정이 됐던건 당연히 그 친구였지. 내가 숨겼으면 아무 일 없었을 속내를 괜히 드러내서 이 친구를 힘들게 만들었구나 싶은 죄책감, 엄한 곳에 진상을 피냐는 듯한 말투의 통화 상대에 대한 미안함, 난 대체 왜 이런가 싶은 자괴감 같은게 계속 머릿속을 빙빙 맴돌더라고. 





소주가 반쯤 남은 잔을 들어 비웠다. 벌써 세 병 째다.

"응,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는 생각은 애인이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가졌던 생각으로도 충분했었어. 그래서- 앞으로는 애인 있는 사람까지만! 응, 그런 사람까지만 만나려고. 하하하하"


비어버린 잔을 채우다 내 말에 놀라 날 바라보는 녀석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안 본 척하며 얼른 술잔을 들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술이 달고, 아직 정신을 덜 차렸다는 녀석의 말이 가물가물하다. 갚을랬쑤유라고는 못해줄 망정 미쳤네 정신 덜 차렸네 뭐 이런 얘기나 하고 말이야. 암만 그래도 형인데 자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