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내가 가장 동경하던 것은 기숙사 생활이었다. 순전히 당시에 읽은 책들의 영향이었는데, 제일 대표적인 것이 <키다리 아저씨>였고, <말괄량이 쌍둥이와 XXX> 라는- 지금은 제목도 가물가물한 그 소설 시리즈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여자아이들이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아웅다웅하고, 책에서 봤듯 꿈과 사랑과 눈물과 성장이 함께 하는 이야기들을 내가 그려가고 싶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기숙사가 있는 학교란 드문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나는 초, 중, 고, 대학교를 모두 인천에서 졸업했고, 대학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걸어다니기에 충분한 거리였기 때문에 기숙사 생활이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리고 또 동경하던 것이 뭐였냐면, 소꿉친구였다. 어려서부터 이웃하면서 친하게 지내면서 형제처럼 자라는 남자-_- 소꿉친구. 그냥 내 순수하던 시절부터 서로 잘 알고 이해하고 변함없이 마음이 통하는 그런 친구를 원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본 대부분의 책에서는 결국 그 소꿉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엔딩이 나왔고- 거기에 대한 환상도 쪼금은 있었던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부끄럽군;;)
그리하여- 내가 '국민학생'이던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만화 중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었다.
(위의 설명에는 2001년 시공사 판으로 되어있지만, 내가 알기로는 90년대 초에 서울문화사에서 출간된 책이다)
<인어공주를 위하여>는 80년대 대구를 배경으로 고등학생인 이슬비, 서지원, 백장미라는 세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순정만화다.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던 푸르매와의 결혼 약속을 믿고 10년을 살아온 꿈많은 소녀 슬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몸이 약해 2년을 유급해서 슬비와 같은 반이 된 장미, 그리고 장미가 8년간 짝사랑해온 초미남에 공부도 잘하지만 폭력서클의 짱인 지원의 만남과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만화의 최대 인기요인은 일단 작가 이미라의 눈부시게 예쁜 그림체가 첫번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살아있는 것 같고 눈동자는 하나같이 반짝거리는 이미라의 그림체는 그야말로 순정만화의 정석과 같았다.
또 하나의 요인은 그야말로 '완벽' 자체인 남자주인공, 서지원이라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심하게 잘생긴 외모에 깡패 집단 대장일만큼 싸움을 잘하면서 학업 성적마저 뛰어한, 어딘가 상처를 갖고있는 복합적인 캐릭터. 귀여니를 비롯한 인터넷 소설의 남자주인공들은 대부분 이 캐릭터에 빚을 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 캐릭터의 이름은 몇년 후 데뷔한 남자 가수의 예명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가수가 맞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 만화에서 표현하는 감수성에 대한 공감이었다.
여자 주인공 슬비는 7살 때 같은 동네에 살던 소꿉친구 푸르매라는 소년과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지금 그녀의 나이는 17세. 그러나 그녀는 그때 이사가던 푸르매가 '열일곱 되는 생일때 반드시 찾아와 청혼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굳게 믿고 있다. '푸르매는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으니까' 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또 하나의 여자 주인공인 장미는 초등학교 때 전학온 지원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후,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만난 그를 8년째 사랑하는 중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천사같던 지원은 악의 화신이 되어 나타났으나, 장미는 지원의 아름다운 영혼이 그의 내면에 그대로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지원에게 손 내밀어 그 순수함을 되돌려줄 사람이 자신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친구가 된 슬비와 장미는 서로를 응원한다. 슬비가 푸르매를 꼭 만나기를, 장미의 '그 사람'이 장미의 마음을 받아주기를. 그리고, 비밀이 밝혀진다. 슬비의 푸르매가 바로 서지원이었던 것.
만화의 결말은 서지원과 슬비의 해피엔딩이다. 그렇지만 사실 지원이 장미를 선택했다 해도 이 작품이 가진 느낌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미는 주인공들을 방해하는 사랑의 라이벌 같은 조연이 아니라, 슬비 못지 않게 큰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었다. 작품에서 '인어공주'로 대변되었던 인물이 바로 장미이고, 이 만화의 제목이 <인어공주를 위하여>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중요한 것은 이 만화에서 시종 강하게 분출되었던 '순수성'에 대한 믿음이다. 흔히들 말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 그때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함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내재되어 있을 거라는 믿음. 꼬마 때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슬비처럼, 어렸을 때의 빛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은 장미처럼, 그리고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아낸 지원처럼.
세상은 순수함을 지키고 살기에는 너무나도 거칠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몇 번이나 변하게 되는 순간을 직면하게 되지만, 결국 진정으로 통하는 것은 조건 없는 사랑과 믿음, 기다림 같은 순수한 가치라는 것을, 이 만화는 9권의 책을 통해 계속 전달하고 있고- 그 감수성이 소녀 독자들에게 제대로 먹혔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순정만화를 읽던 여느 소녀들처럼 나도 그 감수성 안에서 꿈꾸기도 했던 것 같다.
물론 세상은, 만화 밖의 진짜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랑은 연락하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남자 아이들과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다 =_= 같이 자란 소꿉친구 같은 것도 없었고, 커서 몇 번 누군가를 좋아해 봤지만 나도, 내가 좋아했던 상대도 내가 찾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기에는 너무 세상에 물들어있던 상태였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건데..
나는 그것을 아쉬워할 만큼의 순수함은 있는 걸까.
아니면, 난 그저 판타지 속에서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른이 넘도록 이 세상에 적응을 못하고, 내게 익숙한 환상의 세계만 찾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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