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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01110 / 첫사랑] 돌이켜 생각하면 그건 사랑이었네. by 김교주

"선생님이 좋아요. 괜찮겠죠?"
난 가슴이 좀 두근댔을 뿐 아무런 수치감도 주저도 없이 그에게 물었다.
"괜찮고 말고."
"정말이죠? 약속해요."
 


"경아, 경아는 나로부터 놓여나야 돼. 경아는 나를 사랑한 게 아냐. 나를 통해 아버지와 오빠를 환상하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제 그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봐, 응? 용감히 혼자가 되는 거야."


박완서, <나목> 중에서



나목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박완서 (세계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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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남 화가(였지만 지금은 미군 px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을 해서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옥희도와 전쟁통에 아버지와 오빠들을 잃고 소녀가장이 된 이경. 작품은 시종일관 이 두 사람의  고독과 서로를 향한 애정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며 진행된다. 처음 자신있게 자기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역시 철없고 나어린 이경이지만, 옥희도가 그런 그녀를 끌어안고, 입맞추고, 그녀를 통해 바닥에 떨어진 예술가적 자존심을 되찾으려 몸부림 치는 행위는 옥희도 또한 이경의 마음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들의 이런 모습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속해 있는 상황에서의 탈출을 꿈꾸기 위한 하나의 신기루에 가깝다.

이경은 옥희도에게서, 옥희도의 말처럼, 아버지와 오빠들을 본다. 옥희도의 아내를 질투하고 그의 가정을 파탄내기를 꿈꾸며 자신이 그 아내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이경의 욕망은 어리기 때문에 풋풋하고 같은 이유에서 가여우며, 그러나 역시 용서받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옥희도는 자신이 이경의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아내와 아이들이라는 사실 역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경이 마주쳐야 했고 마주쳐야 하는 불행 앞에 이경에게 위안을 준다는 사실에 심취하여 이경을 잊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한다.  마침내 맞이하게 되는 파국. 이들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우리는, 집착도 사랑의 한 가지 방식이라고 말하는 사랑에 더할 나위 없이 관대한 사람들이 아닌가. 이것은 불륜이고, 구질구질한 전쟁통에서의 이야기일 망정 그래도 최소한 이경에게는 그 구질하고 간난한 삶의 한 귀퉁이에서 피어난 첫사랑인 것이다. 이경이 살아가야 하는 힘의 원천이 되고, 무섭도록 줄기찬 질투에 사로잡히게 하고, 자신보다 오히려 상대를 삶의 중심에 놓게 만드는. 사랑이란, 첫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것. 어떤 상황에서건 아름다운 아픔이 되는 것. 


먼 옛날 같은 앳된 날, 그지없이 향기로운 관을 씌우고 싶었던 옥희도란 이름 위에 '故' 자가 붙은 것이다.
좀전에 둔탁한 아픔을 느낀 자리가 예리하게 쑤셔왔다.
오열이라든가 하다못해 신음이라든가, 그런 아픔을 나눌 엄살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온전한 나만의 비통.

 <나목> 중에서


오랜 시간이 흘러 자신의 가정을 만들고 살아가던 이경에게 옥희도의 죽음이 전해지고, 그녀는 아릿한 고통에 빠져든다. 이 아련함, 이 예리한 아픔. 이런 것들을 느끼게 하는 감정을 그 어찌 사랑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돌이켜보면, 그건 정녕 사랑이었을 텐데. 진정. 그녀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