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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01809 / 온도] 동지애와 무용담 by 란테곰


올 여름이 정말 덥긴 더웠나보다.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 사이에서도 안부 다음으로 묻는 것이 올 여름을 어찌 났느냐였다. 아무리 평소 가깝게 지내고 명절 때마다 서로 반기는 친척 지간이라도 오랜만에 마주쳤을 땐 아주 약간의 어색함이 있기 마련인데, 여름 얘기를 꺼내자마자 어색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동지애가 뿜뿜 터졌다. 사춘기에 들어서 말 한 마디 않던 십대 조카부터 칠십대 큰아버님까지, 자기가 견뎌낸 모든 여름 중 올해 여름이 제일 더웠고 힘들었다고 입을 모아 얘길 했다. 전기세를 어마어마하게 냈네, 우린 에어컨이 있어도 켜질 못했네 등등 수많은 무용담도 쏟아졌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지긋지긋한 여름이었다. 두어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든다. 심지어 난 올여름을 집에서만 보냈는데도 그랬다. 


벽걸이나 커다란 에어컨은 사기도 설치하기도 부담이라 창문형 에어컨을 살까 고민했었다. 그나마 새거는 가격도 가격이지만 배송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포기하고 나니, 이미 20년된 중고를 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20년된 중고 에어컨을 10만원에 팔다가 15만원으로 올리고, 그걸 20만원, 25만원으로 올려부르는 판매 업자들의 한탕주의도, 진동과 소음을 감수하고서라도 중고 카페에 매물이 올라오자마자 팔릴 정도로 필요한 사람이 많았던 것도 올해의 미친 날씨를 매우 잘 설명하고 있었다. 거래를 놓친 사람들이 먼저 거래에 성공한 사람을 축하하는 진풍경이 벌어질 정도였다.


내 방과 동생 방의 선풍기는 집에 사람이 있는 동안 쉬질 못했다. 8월 초쯤 동생이 쓰던 선풍기가 고장이 나 동생이 2-3일가량 선풍기가 없이 지냈던 적이 있었다. 바로 선풍기를 주문했는데 재고가 모자라서 1주일 쯤 걸린다 했을 적에 어찌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예전에 선물받았던 조그만 선풍기가 있었다는 것을 겨우 떠올려 동생에게 쥐어줬더니 그걸 뒤늦게 떠올렸냐며 타박하기보단 매우 해맑게 좋아하던 동생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보름 즈음 뒤엔 내 선풍기가 죽었다. 허나 그 때 즈음엔 이미 한낮에도 34도 내외의 선선한 온도(?)라 조그만 선풍기로도 버틸 만 했기에, 새 선풍기는 내년에 사기로 하고 넘겨버렸다. 




혹시나 다음 명절인 구정에 친척들을 만났을 때 올해 겨울이 제일 춥고 힘들다고 입을 모아 얘길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더운 쪽이 낫다며 여름이 얼른 찾아오길 바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올 여름을 넘기며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보면- 우습지만 웃기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