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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01805 / 폭행] What's my name? by 란테곰.

남자는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기지개를 켜는 습관이 있는 남자는 기지개를 켜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는 자신이 분명 어젯밤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잠들었음에도 지금 어딘가에 앉은 채 양팔과 양다리, 몸이 묶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덧붙여 눈도 가려져 있고 입에는 테이프 같은 것이 붙어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 남자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몽유병이 갑자기 생겨서 나 자신을 구속했나 라는 의심을 함과 동시에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라는 노래 가사를 조건반사처럼 떠올렸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무엇을’을 제외한 – ‘무엇을’의 대상은 나였고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도 나 자신이었다 - 4W 1H에 대해 의구심을 안은 채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선 자신의 몸은 의자 같은 것에 꽁꽁 묶여있었다. 눈도 가려져 있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애써봤지만, 그 의자 같은 것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생각했다. 여기는 내가 모르는 곳. 과연 누가, 언제, 어떻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 순간, 끼이이이익. 오래 쓰지 않은 쇠로 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문은 다시 쿵 하며 닫히는 소리를 냈다. 또각, 또각.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문을 열고 들어오기 직전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다시 숨을 내쉬기까지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을 한 여자는 숨을 내쉬고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오래 쓰지 않은 쇠로 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장갑을 안 꼈으면 녹이 손에 묻어났겠네, 라고 생각하며 여자는 문을 닫았다. 문을 쿵 하며 닫히는 소리를 냈다. 또각, 또각. 구둣발 소리가 건물 안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구둣발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남자가 묶인 채 앉아 있는 의자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안녕. 오랜만이에요.” 당당하고 차갑게 말하겠다며 수십 번을 연습했던 것과 다르게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나왔다. 여자는 조금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침착해, 침착하자. 의자에 묶인 남자는 “읍읍읍” 이라는 멋진 표현으로 여자의 인사에 답했다. 여자는 말을 이어나갔다.


“오랜만에 봤는데 욕을 하고 그러세요. 하긴 평소에도 험한 말을 입에 달고 살긴 했지.”


여자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 남자가 긴 시간 “읍읍읍” 이라는 같은 말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가슴은 더욱 빨리, 그리고 강하게 뛸 뿐이었다. 오랜 시간 꿈꿔왔던 일이 눈앞에서 이뤄지려는 순간이기에 그럴까. 오로지 그걸 위해 여태 버티며 살아왔기에 그럴까. 


여자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가방 안에 들어 있을 모종의 물건을 떠올리며 여자는 숨을 골랐다.




남자는 욕을 한 것이 맞았다. 당연했다. 날 이런 상황에 놓이게끔 만든 사람에게 좋은 말이 나올 수 없었다. 여자가 말했듯 입이 걸었기에 더더욱 그랬고,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니 더더욱 그랬다. 한참을 “읍읍읍” 이라는 한정된 표현으로 성토하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던 남자에게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침착해요. 난 당신이랑 조금 얘기를 할 거야.”


게임? 사람을 묶어놓고 이런 미친.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올라온 분노가 목을 통해 입으로 나왔다. 하지만 입 앞에 붙어 있는 테이프 같은 것이 그 분노를 맘껏 토해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해 입안에서 맴돌던 그 분노는 다시 가슴으로 되돌아와 남자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남자는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때.


“지금 모습, 십 삼 년 전에도 비슷했어. 나한테요.” 여자의 말에 남자는 머릿속에서 번개가 튀는 느낌을 들었다. 십 삼 년? 십 삼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이런 일을 당할 정도로 잘못한 일이 있었나. 남자는 당장 자신이 처한 상황이 썩 즐겁지는 않지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보다 과거의 자신을 되새기는 것이라 결정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십 삼 년 전의 자신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남자가 진정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것만은 확실히 해야 해. 이것만은. 이게 제일 중요해. 몇 번이나 다짐을 되새긴 여자는 남자가 잠잠해진 것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맞아. 난 십 삼 년 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해. 그리고 그 얘기가 원만하게 풀린다면 난 아무 말 않고 당신을 풀어 줄 거에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해.”


두 가지의 상반된 기대감이 여자의 몸을 휘감았다. 난 오늘 내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어떤 꿈일지는 너에게 달렸지만. 여자는 말을 이어나갔다.


“원만하게 풀리는 방법은 간단해. 난 십 삼 년 전에 있던 일들을 얘기할 거고, 난 그걸 통해 당신에게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듣고. 그걸로 끝. 간단하지요?”


여자는 남자의 동의를 구하듯 잠시 틈을 두었다가 남자가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너무 긴장했나 봐. 여자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며 설명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십 삼 년 전의 일에 대한 사과. 그 사과가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내 눈을 보며 내 이름을 부르고, 미안하다는 말 딱 한 마디면 충분해. 당신이 오케이 하면, 난 십 삼 년 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할 거고, 곧바로 당신이 내 얼굴을 보며 사과를 할 수 있게끔 할 거야. 근데 만약 5분 안에 내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면, 그래서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못하면 우리 대화는 원만하게 끝나지 않을 거야. 알겠으면 고개를 끄덕여요. 바로 시작할 거야.”




남자는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리는 이해와 관계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십 삼 년 전에 너랑 내가 어쨌는지 난 전혀 몰라. 그렇지만 뭐가 어쨌든 난 니 망할 년의 얼굴을 보고 그 이름만 기억하면 된단 말이지?’ 남자는 십 삼 년 전의 자신을 떠올리는 것에 집중했다. 


남자의 삶의 목표는 돈을 많이 벌고 그걸 쓰는 것이었다.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 했다. 그래서 남자는 내 일을 만들고 도와주는 사람들과의 친분을 쌓으려 그 누구보다도 애를 썼다. 똥구멍을 핥듯 경조사를 챙기고 쓸개를 내주듯 술자리에서 접대하는 것을 기꺼워했다. 돈만 많다면 나보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존대를 하고 일일이 술잔을 채워주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긴 시간을 살아온 남자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리고 십 삼 년 전은 남자가 이미 벌 만큼 벌었을 때였다. 남자의 똥구멍을 핥듯 하고 남자에게 쓸개를 내주듯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졌다. 접대는 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남자는 점점 변해갔다. 허리를 조아리며 쌓아온 겸손함은 배와 가슴을 잔뜩 내밀고 뒷목이 뻣뻣한 오만한 자세가 되었다. 바르고 좋은 말만 하려 애쓰던 모습은 폭언과 고성으로 바뀌었다. 타인을 배려하던 모습은 상대를 눈으로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일을 하는 남자의 모습은 여전히 밝고 싹싹했다. 남자는 멍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렇게 살아왔기에 누구보다도 눈치가 빨랐다. 


이 여자는 사과를 원한다, 그리고 난 어떤 상황에서도 그걸 할 수 있다. 남자는 입으로만 할 수 있는 사과라면 수백 수천 번을 해왔으며, 그건 남자에게 ‘일’이었다. 지금은 내가 굽혀준다. 이름만 기억하면 된다. 이름만. 당장 불리한 이 상황만 넘기고 나서 나중에 갚아주면 된다. 자유와 안전이 확보되는 순간 갚아주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즐겁게. 


남자는 머리를 차가워지게 하려 애썼다. 입에 붙은 테이프가 거슬렸지만, 코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읍읍읍.”




여자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장갑을 낀 양손에 땀이 가득 찬 기분을 느끼며 여자는 바싹 마른 입을 열어 얘기했다. 


“난 십 삼 년 전에 당신 거래처였던 회사에 다니고 있었어. 말이 거래처고 우리는 협력 업체였지. 회사에서 당신 똥꼬 엄청 닦고 다녔어. 내가 자다 깨서 네 룸살롱 돈 계산하러 강남 넘어간 것만 해도 몇 번인지 몰라.”


목이 너무 말랐는지 마지막 말의 끝이 갈라졌다. 여자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안에서 물병을 꺼냈다. 가방 안에 모종의 물건과 함께 담겼기에 물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뚜껑을 열어 물을 마신 여자는 가방 위에 물병을 놓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 날도 그랬어. 네 술값 계산하라고 강남으로 나오라고. 속으로 오만 욕을 해가면서 계산하러 갔더니 네가 웬일인지 입구에 나와 있더라. 인사하고 계산하러 가려는데 날 붙잡고 그랬지. 같이 한 잔만 먹자고. 좋게 거절하니까 바로 쌍욕을 뱉으면서 소릴 고래고래 지르기에 난 어쩔 수 없이 당신 룸으로 끌려갔었어. 그리고, 당신은 날 성폭행했지. 강간했어. 강간하는 도중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워가면서. 강간하는 내내 쌍욕을 외쳐가면서. 끔찍했어. 그 말 말고는 내 기분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여자의 마지막 말이 다시 갈라졌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분노 때문이었다. 여자는 다시 물병을 들어 물을 마셨다. 물병을 가방 위에 놓은 여자는 말을 이어나갔다.


“합의해달라는 전화가 하루에만 백 통 가까이 왔었어. 전화를 안 받으니 집에도 찾아왔고, 회사로도 사람이 찾아왔지. 내 집뿐만이 아니라 부모님에게도 연락이 갔어. 회사의 사람들도, 부모님도, 친척들도 다 그 사실을 알게 됐지. 난 결국 회사를 그만뒀고 부모님과 친척들과도 연락을 끊었어. 근데 당신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생긴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너무 잦은 연락에 지친 아버지와 합의를 했다는 이유로 집유를 받았어. 심지어 초범이 아닌데도, 나처럼 당한 사람이 여러 명 있었을 텐데도 그랬어.”


여자는 분노로 인해 온몸을 부르르 떨며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내가 억울하지 않겠어? 난 사과도 받지 못했어. 그러니까, 제대로 사과해. 내 눈을 보면서,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남자는 필사적으로 그때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여자의 말대로 남자가 운영하던 회사엔 협력 업체들이 꽤 많았다. 말이 협력이지 사실상 하청 업체에 가까웠고, 남자는 그런 업체들에 예쁜 여직원들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어 자신의 욕망을 해소해왔다.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업소에서 닳고 닳은 여자들과의 섹스는 남자에게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합의를 위해 필요한 인력에 드는 비용, 유명한 변호사의 비싼 수임료, 합의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협력 업체들에서 그만큼 뽑아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자가 했던 말대로 같은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점이 남자를 난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딱 한 번, 어쩌다 한 번이 아니었기에 남자는 십 삼 년 전에 자신을 고소했던 상대의 이름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동안 같은 방식으로 섹스를 했던 협력 업체 여자들을 차례차례 떠올리려 애써봤지만 십 삼 년 전이라는 것과 목소리에 의지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렇게 섹스를 한 여자들의 숫자였지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남자는 답답한 심정에 발을 동동 구르려 했지만, 의자에 묶인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하고 있다가 손을 뻗어 남자의 귀에 걸린 안대의 끈을 잡았다. 남자의 몸이 움찔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한두 명이 아니니까 말만 들으면 누군지 모르겠지? 좋아, 내 눈을 보고 사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줄게. 오래 본다고 기억날까? 아까도 말했지만 내 얼굴을 보기 시작하면 딱 5분 줄 거야.”


여자의 손은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움직였다. 남자는 눈이 부신 듯 한참을 얼굴을 찡그린 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여자는 손톱을 물어뜯고 싶은 기분을 참아가며 끈질기게 남자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길 기다렸다. 




남자가 겨우 눈을 떠서 본 것은 자신의 몸이었다. 등받이엔 몸과 가슴팍은 뒤로, 엉덩이와 허벅지는 아래쪽으로 묶여있었다. 자신이 묶여있는 곳은 폐건물의 느낌이었다. 조명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머리 뒤쪽으로 가로로 길게 난 창문에서 빛이 들어와 자신의 등을 지나 바닥을 비추고 있었기에 낮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창문 밖의 상황을 살피고 싶었던 남자는 고개를 뒤로 돌린 채 몸을 움직여보려 애썼지만, 의자가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지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몸을 풀썩거릴 때마다 먼지만 조금씩 피어올랐다. 


“가만있어요. 먼지 나잖아. 움직여지지도 않고 움직인대도 밖은 보이지도 않아. 내 눈 안 볼 거에요? 날 봐야 날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여자의 짜증 실린 날카로운 목소리가 남자의 귀로 파고들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여자가 서 있었다. 


삼십 대 후반? 작지 않은 키. 가슴까지 오는 웨이브 진 머리, 진한 보라색 정장, 하얀 셔츠, 갈색 장갑, 검은 구두. 다소 살집이 있지만 그게 매력 있는 몸. 그리고 저 얼굴은. 분명히 기억나는 얼굴. 그래 맞아, 난 분명 널 만난 기억이 있어. 어디선가 분명. 남자는 같은 말을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주어진 정보 안에서 이 사람을 어디서 보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십 삼 년 전, 협력 업체, 강남 룸살롱 술값 계산. 십 삼 년 전, 협력 업체, 강남 룸살롱 술값 계산.


술값 계산? 남자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듯 일련의 흐름이 이어져갔다. 그래 맞아, 협력 업체 사장이 술 산다고 나를 부르고 비서 겸 경리랍시고 데려와 인사를 시켰던 여자가 있었어. 사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여자 앞에서 업소 여자를 불러서 놀았지. 접대가 끝날 때까지 여자 표정이 하나도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내심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여자였구나. 접대비 계산하러 새벽에 오는 협력 업체 사람 중에 여자는 그 여자가 유일했지. 맞아.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살피는 눈에서 갑자기 생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뭔가 떠올렸나 보네. 침을 꿀꺽 삼키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여자는 오른손을 들어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초침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여자는 생각했다. 과연 너는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떠올리고 무슨 말을 할까. 여자는 조심스럽게 왼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혹시나 쓰게 될 수도 있으니까.




남자는 오른손에 찬 시계를 보는 여자를 보면서 또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네 번째였나 다섯 번째였나, 암튼 그날도 접대비 계산 호출로 그 여자를 봤을 때였다. 그날따라 괜히 기분이 좋아 여자에게 몇 마디 건넸는데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건조한 대답을 남기고 바로 아무 말도 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참 딱딱한 년일세, 근데 저런 게 더 맛있지. 라고 주워섬기던 남자는 문득 오른손에 시계를 찬 여자의 손목에 눈이 갔다. 손목 안쪽으로 차기엔 다소 큰 시계를 오른손에 찼기에 더더욱 눈이 갔을까. 이왕 찰 거면 이쁜 거나 좀 차지. 라며 남자는 혀를 찼었다.


남자는 그 뒤로도 수많은 것들을 떠올려냈다. 그날 여자를 범하며 마셨던 술의 종류나 담배의 개비 수, 가장 오래 즐겼던 체위, 그때 여자가 지었던 표정, 격렬히 거부할 때의 말투, 심지어 그 날 여자를 데리고 들어가며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는 명목으로 팁을 줬던 웨이터의 이름까지도 떠올려냈다. 하지만 여자의 이름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흔한 이름이라서 그런가. 분명 듣긴 들었는데. 그렇게 자신 속으로 빠져들다 너무 답답해서 미쳐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였다.


“5분 됐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절망감을 느끼며 욕을 퍼부었다.


“읍읍읍!”




여자는 한심하다는 듯 남자를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입에 붙은 테이프를 뗄 거야.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이름, 정말 미안합니다. 딱 아홉 글자야. 혹시나 다른 말이 나오거나 일정 시간 아무 말이 없으면, 난 우리의 대화가 원만하게 풀리지 않았다고 결론짓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이걸 쓰면서.”


분노와 절망이 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흘낏 바라본 곧 여자는 가방을 열고 두꺼워 보이는 장갑을 꺼내 왼손에 덧대어 꼈다. 그런 다음 왼손을 조심스레 가방 안에 넣고는 안에서 손에 딱 맞게 깎인 물건을 그러쥔 채 꺼냈다. 드라이아이스로 만들어진 송곳이 여자의 장갑 안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손바닥 아래쪽으로 길게 나온 송곳을 바라보며 여자는 말했다.


“소리지르고 싶으면 마음껏 질러. 암만 크게 질러도 아무도 못 들을 거고, 당신의 입에서 내가 말한 아홉 글자가 아닌 소리가 나오면 난 바로 이걸 내 마음대로 쓸 거야. 준비됐지?”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하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한쪽 입꼬리만 살짝 들어 올렸다. 남자의 입에 붙은 테이프로 오른손을 뻗으며 여자는 말했다.


“난 내가 너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얼굴은 어떤지, 심지어 내 이름은 외자라는 것까지 알려줬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 짓지 마, 우리나라 말이잖아. ‘정말 미안합니다’에다 내 이름을 합쳤는데 아홉 글자면 이름이 외자라는 말이야. 여튼 난 이제 테이프를 뗄 거고, 딱 1분 줄 거야. 생각 잘 해봐.”




찌익. 남자는 테이프가 입에서 떼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외자, 외자였다고? 송곳을 들고 있는 저 여자가 과연 어떤 자세로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누가 봐도 뻔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일단 이 상황만 벗어나면 충분하다. 그러려면 난 저 빌어먹을 년의 이름을 기억해내야 한다. 네년 아비가 받아먹은 합의금이 대체 얼만데. 근데 왜 이제 와 케케묵은 일로 나를 협박하고 지랄이냐. 여튼, 농담이든 장난이든 난 살아야겠고 일단 이 위기를 벗어나려면 이름을 기억해야 해. 저 미친년의 이름을...


“거기까지”


퍼뜩 고개를 들어 여자를 보니 여자는 시계를 보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 말 없어? 라는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던 여자는 곧 송곳을 그러쥔 왼손 위에 오른손을 덧잡고 머리 뒤로 천천히 당겨 올렸다. 마음이 너무 급해진 남자는 외쳤다. 


“잠깐잠깐, 지금 얘기할 거야 지금... 크헉!”


끔찍한 고통이 배에서 느껴졌다. 여자의 머리와 양손이 자신의 배 위에 겹쳐져 있다 다시 올라갔다. 송곳날 부분에는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었고 배에서는 뜨거움과 아픔이 겹쳐진 부위에서 꿀렁꿀렁 피가 솟아올랐다. 고통에 겨워 눈을 홉뜨고 신음을 내뱉는 남자에게 여자는 말했다.


“다시 1분 줄 거야. 생각 잘 해봐.”


“이런 씨발 미친년이.. 크아아악!”




여자의 양손이 남자 배의 다른 부분을 찌르고 들어갔다. 남자의 배엔 순식간에 두 개의 구멍이 났다. 


“아홉 글자야. 다른 거 말하면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했어. 생각 잘 해봐.”


여자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애쓰며 시계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떨려 시간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남자가 내뿜는 신음이 들리지도 않을 정로 크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천천히,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난 사과를 받지 못했어. 아직.




"거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