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있어서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은 어떤 면에서는 정말 맞는 말이다.
일단 어떤 쪽으로 경력이 쌓이면, 그걸 뒤엎고 다른 직종으로 옮긴다는게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언론정보학을 전공한 내가 쇼핑업계-_-의 세계로 오게 된 출발점은 아마도 대학다닐 때 아르바이트로 오래 일했던 백화점 판매직이었던 것 같다. 방학 때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주말 알바로 이어졌고, 휴학하면서 풀타임으로 일했기 때문에 기간으로 따지면 꽤 오래 일했다. 사실 일하면서 내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은 안 했다. 나는 그냥 잘 버텼고, 참을성이 꽤 좋다고 생각했다. 그쪽 계통으로 일할 생각은 없었다.
졸업하면서 들어갔던 첫번째 직장은 전공을 살린 인터넷 신문사였지만 월급을 줄 수 없다 하여 (...) 두달 반만에 그만둔 후에, 여기 저기 취직할 곳을 알아보다가 들어간 곳이 가격비교 사이트를 운영하는 회사였다. 직접적으로 뭔가를 파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를 사게 하는(?) 그런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서 6년을 일했다.. 그렇게 오래 일할 줄은 나도 몰랐다.
한 직장에서 6년을 일한다는 것은 그쪽 경력을 꽤 쌓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 회사를 그만둔 후,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직장들은 죄다 그 비슷한 업종들, 쇼핑과 관련된 회사들 뿐이었다.
그 다음 직장은 또 다른 가격비교 사이트 운영하는 회사였다. 거기서 1년 조금 안되게 일하다가 회사 사정으로 퇴사한 후, 마침내 본격적인 쇼핑업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디자인 문구 중심의 종합쇼핑몰에서 MD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여기서 쇼핑 쪽에 대해 많이 배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매출 압박을 직접적으로 받은 곳은 여기가 거의 처음이나 다름 없었다. 이 곳에서 1년 반 조금 안되게 일하다가, 지금의 직장으로 넘어왔다. 지금 직장은 개인 쇼핑몰이다. 여기서 내가 하는 일은 디자인이랑 제조 빼고는 거의 다...? 인 것 같다. ㅎㅎ
<미생>은 윤태호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이다. 프로 바둑 기사의 꿈을 포기하고 국내 굴지의 종합상사인 원 인터내셔널에 낙하산으로 들어가게 된 주인공 장그래가 겪는 회사 생활과 사회 생활을 바둑으로 읽어낸 작품이다.
원작 웹툰도 재밌게 봤었고, 드라마 역시 (15부 정도까지만) 재밌게 봤다.
거의 평생을 바둑을 생각하고 바둑만 두며 살아온 장그래는 사회적으로는 그야말로 무능한 인간과 다름없다. 그 흔한 대학도 나오지 못했고, 쟁쟁한 스펙을 자랑하는 동기들 틈에서 아무것도 갖춘 것이 없는 그는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바둑을 두며 얻었던 통찰력과 타고난 재능, 그리고 노력을 거듭하여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장그래의 이야기가 <미생>에 담겨있다.
작품 초반 장그래는 정말 혹독하게 고난을 겪는다. 아버지가 입던, 맞지 않는 양복을 헐렁하게 걸친 외양부터가 장그래의 고난을 예고한다. 동기들로부터는 무시당하고, 배정된 팀의 선임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해한다.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본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 장그래는 그 가운데에서 꿋꿋히 버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장그래의 모습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봤을 것이다. 장백기나 안영이 같은 고스펙 능력자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대부분이 장그래처럼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것이 있었고,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간신히 직장에 들어가 힘겹게 적응하고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생> 방영 초기에는 '실제 회사에서 겪는 모습들을 드라마를 통해서 보고 있자니 괴롭다'는 말들도 꽤 나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장그래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 바둑을 둘 때도 매우 천재적이었다는 전제가 배경에 깔려있는 캐릭터이다. 그는 사회 생활을 바둑으로 치환하여 복기하고 다면기를 둘 줄 아는 인물이고, 하나를 배우면 둘 이상은 해낼 줄 아는 인물이다. 결국은 드라마에서 거의 모든 캐릭터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의 그 눈물겨운 '장그래 정규직 만들기'는 정말.. 대단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내가 15회 정도까지만 재밌게 보고 그 뒤는 재밌게 보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15회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기획안을 발표한 장그래에게 오차장은 10만원을 건네주며, 뭔가를 사서 팔아보라고 한다. 장사의 기초를 알아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쩌다가 합류한 장백기와 함께, 장그래는 리어카에서 산 양말과 팬티 세트를 팔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지하철에서도 팔아보고, 장백기가 믿고 만나러 갔던 선배에게 거절당하고, 장그래가 최후의 의지할 곳이라 생각했던 기원에서도 거절당한 후, 둘은 정말로 양말과 팬티가 필요한 장소를 찾아내고 사우나 앞에서 판매를 하게 된다는 에피소드이다.
장사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파는 것이라는 것. 그걸 말하는 에피소드였다.
내가 느낀 바에 의하면, 최근의 '장사'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필요를 창출'하여 물건을 파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좋은 물건을 제시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느끼게 만들어 사게 하는 것 말이다.
정말 얼마나 어려운 개념인지.. -_-
사실 내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매출' 또는 '성과' 같은 것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내가 하는 일 자체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매출이라는 그 구체적인 수치로 평가당해야 한다는 것이 큰 스트레스였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다. 더구나 나는 뭘 팔아야만 하는 직종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어떤 일도 '파는' 것에서 자유로운 것은 없다. 작가든 디자이너든 영화를 만들든 노래를 만들든.. 결국은 그 것의 최종 목적은 '팔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지금 이 세상이다. 그게 맞다.
하지만 이걸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나는 뭐든 그 가치로, 숫자로 평가되는 현실이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나.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이건데 말이지.
나는 아직도 내가 이쪽 일에 적성이 맞는다는 확신이 없다. 솔직히 안 맞는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MD로 일하던 전 직장에서 퇴사하면서 사유로 말한 것도 이거였다. 지금 하는 일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서, 더 나이 먹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내가 잘 할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고.
하지만 사실- 이쯤 되면 내가 이쪽 계통 일에 적성이 맞든 안 맞든 일단 해야 되는 상황이 맞다. 이젠 적성 따위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냥 내게 주어진 일이 이쪽 계통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내부에서 치열한 공방을 거친 끝에 나온 결론이다.
장그래같은 숨겨진 능력자는 아닐지라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안에서는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제는 그걸 받아들여야만(받아들이고도 남아야민) 한다.
지난 여름은 엄청난 불황이었다. 판매 부진을 조금 둔하게 느낀 나와는 달리 나의 직장 상사는 그 때문에 매우 괴로워했다. 다가오는 10월부터는 또 새로운 상품들을 준비하고 있는데, 부디 내 직장 상사의 바람대로, 잘 됐으면 좋겠다. 나도 내 몫을 잘 해내야겠지..
잘,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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