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지 모르지만, 봄이라는 주제를 받아들자마자 봄하면 역시 권태지!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상의 권태를 다루려고 했는데.... <권태>의 배경은 다시 한 번 왜인지 모르지만 여름이었다. 누가 봐도 내 기억의 왜곡을 탓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어쩐지 배신감이 몰려들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권태>가 봄에 쓰여진 수필이라 여겼던 건 왜였을까. 그만큼 내게 봄이란 나른하고 권태로운 계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처음 생각했던 작품에서 어그러졌다고 해서 글을 쓰지 않을 수는 물론 없다. 그래서 이 작품을 골랐다. 수필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너무도 유명해서 모르기 힘든 작가 피천득 님의 <봄> 이다.
“인생은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사월은 천치와 같이 중얼거리고 꽃 뿌리며 온다."
선생은 에드나 밀레이의 시를 인용하며 수필을 연다. 여기에 곧바로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엘리엇의 황무지를 연결한다. 그리고는 마치 너스레를 떨듯, 자신처럼 범속한 이들은 이렇게 사치스러운 말을 하는 대신 봄을 기다린다며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피천득 문학의 힘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평범하고 친근한 우리네 이웃의 이야기가 그의 붓 끝에는 있다.
작가는 '봄이 올 때면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며 봄을 젊음과 연결한다.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젊음을 다시 가져보게 하는 것은 봄'이며, '잃었던 젊음을 잠깐이라도 만나 본다는 것은 헤어졌던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기쁜 일'이다. 아마도 선생은 이 글을 쓸 무렵 자신의 인생에서 이미 봄을 지나쳤다고 생각할 만한 연세였을 것이다.
'봄을 40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적은 축복은 아니'라거나, '봄이 40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것'이라는 위안을 보면 불혹을 넘긴 나이가 아니었을까 어렴풋이 유추하게 된다.
청춘은 잃었으나 유폐되어 있는 금으로 만든 새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는 당당한 고백과 함께 작가는 다가오는 봄을 그리워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책으로 채 네 페이지가 되지 않는 아주 짧고 단순한 이 수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 하나하나가 정감 넘치면서도 섬세하고 아름답다. 지나가버린 인생의 봄을 단순히 안타까워하고 후회하며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봄을 '무디어진 지성과 둔해진 감수성'을 되살리고자 기다리는 모습 덕분에 그 아름다움은 매력을 더한다. 우리는 누구나 나이먹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피천득은 알게 모르게 천상병과 궤를 같이 하는 작가다. 한쪽은 어린아이 같은 시인이고 또 한쪽은 어린아이 같은 수필가다. (물론 피천득 선생도 시작에 전념했었다는 건 비밀. 시 보다는 수필 쪽이 훨씬 더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는 건 안 비밀.) <귀천>에서 보이는 죽음을 봄소풍으로 후려칠 수 있는 여유는 봄을 청춘의 전유물로 보지 않는, 자신의 나이에 대한 너그러움이 드러나는 <봄>의 여유와 묘하게 닮았다. 금아의 수필집 <인연>과, 천상병 선생의 <귀천> 일독을 권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을 읽을 사람들도 이제는 봄이라고 할 나이를 지났으리라 생각한다. 100세 시대 운운하며 기대수명이 아주 길어진 날들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우리 인생의 봄에 자리하고 있다기에는 양심이 조금 아프다. 꽤 양보해서 늦봄 즈음이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지금이 늦봄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120살 넘어서까지 살아야겠지.)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내 생의 한여름 쯤으로 본다. 봄은 이미 지났고, 가을은 아직 먼 것 같아도 금방 찾아오게 될 것을 안다. 가버린 봄날을 뒤돌아 보며 피천득 선생의 짧은 수필을 다시 읽는다. 내 생애 봄날은 가고, 올해의 봄은 오고 있다. 이 봄을 보다 아름답고 기쁘게 맞기 위해 내 여름을 멋지게 살아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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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쓰는 게 아니라 써지는 거라던데. 헛소리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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