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놓아야 하는지가 내가 마주친 첫번째 과제였다. 이상의 <날개>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금홍을 기생으로 볼 것인가 매춘부로 볼 것인가. 매춘부는 기생인가 아닌가. 그러던 차에 요즘 한참 읽고 있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중종편에서, 황진이에 대한 언급을 발견했다. 당대 최고의 기생이었으나 실록에는 전하지 않는다는 한 컷에 어쩐지 마음이 쏠렸다. 기생의 범주고 뭐고를 떠나 결국 <날개>를 버리고(?) <황진이>를 고른 건 그렇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2006년 가을, KBS가 이 사극을 방영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때의 하지원의 연기를 그녀의 최고의 연기로 친다.(황진이-하지원 초성 돋네) 그리고 이 드라마가 내게는 하지원 필모그래피의 가장 위에 있다. 한창 고전문학에 빠져 있던 때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이 한 편의 사극이 내게 미친 영향은 의외로 컸다.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학교 도서관을 뒤져 황진이에 대한 온갖 소설과 논문집들을 찾아내 읽어제꼈(?!)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원작은 김탁환의 <나, 황진이> 라는 설이 있지만 나는 김탁환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 사실 그는 내가 은사라고 부르며 최근까지도 인사를 드리러 찾아뵙는 지도교수의 대학동기이자 친구다. 새 책을 출판할 때마다 내 지도교수의 연구실 서가에는 그의 책들이 꽂히곤 했는데 은사께서는 그야말로 낄낄거리고 웃으며 '저 친구 책은 재미가 없어.'하고 장난 섞인 혹평을 하시곤 했다. 내가 김탁환에 대해 어느 정도 편견을 갖게 된 건 다 교수님 때문이다. ... 급격히 좋은 결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렵 김탁환의 <나, 황진이>와 함께 전경린의 <황진이>와 홍석중의 <황진이>를 함께 읽었다. 원작을 읽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에는 세 편의 책이 가진 특징과 내용들이 뒤엉켜서 껌처럼 눌러붙어 있었는데 이 글을 쓰기 위해 기억을 끄집어내보니 김탁환은 제거하고 나머지 두 편만 뒤섞인 채라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세 작품 가운데 김탁환의 작품이 제일 재미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춤, 노래는 물론이고 시와 그림, 악기 연주까지 다양한 방면에 능통해야만 했던 옛 기생들은 신분은 천민이었으나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상류층과 어울리는 묘한 정체성을 갖는 집단이었다고 한다. 매춘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매춘부로 치부하기에는 그들이 갖고 있었던 다른 숱한 재능들이 아까워지는 지점이다. 게다가 황진이는 당대의 기생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명기였다고 하며, 그것은 그녀의 숱한 작품들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부분이랄 수 있겠다.
김탁환의 <나, 황진이>는 황진이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나, 를 강조하고 있듯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황진이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관조하는 듯 담담한 독백형식으로 작품이 이어져 나가는데 문제는, 재미가 없다. 고색창연한 어휘의 사용이나 1인칭 시점 같은 시도는 독특하기는 하지만 즐겁지는 않다. 김탁환은 자기 전공을 너무(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거니까 너무, 가 맞겠다) 잘 살리는 작가다. 굳이 그렇게까지 안해도 될텐데.
전경린의 황진이는 기생 황진이, 보다는 여자 황진이에 집중되어 있다. 전경린이 우리 나라 작가들 중에 연애담을 가장 잘 쓴다 카더라....는 썰이 있는데 그 썰을 믿어도 좋을 정도. 그녀의 작품 속 황진이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영특한, 그러면서도 당당한 아테나 같은 황진이다. 반면 홍석중의 황진이에서는 놈이가 부각되면서, 아름답지만 처절하고 외로운, 혹은 아름다워서 괴로운 황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쪽의 황진이는 사랑 때문에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는 페르세포네, 혹은 아프로디테에 가깝다.
문장가로의 황진이를 원하면 김탁환을, 아름답고 사랑에 능한 황진이가 땡기면 전경린을 고르면 된다. 하지만 역시 기생이며, 동시에 여성인 황진이를 만나고 싶다면 홍석중의 황진이를 권한다. 세 편의 작품 가운데 단연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다.
사족: 전경린은 자신의 황진이 를 발표하면서 홍석중의 황진이를 좀, 깠다.(주인공이 황진이가 아니라 놈이라며...)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받아들이는 청자 입장에서는 분명히 그랬다. .... 그러심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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