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가톨릭 미사 통상문 가운데 영성체 직전에 올리는 기도문의 일부다.
조금 알아듣기 쉽게 바꿔 말하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밀떡이라는 걸 신부님이 나눠주는데, 그걸 받기 직전에 올리는 기도문이다. 놀랍게도 나는 가톨릭 신자다. 그것도 '잔다르크'라는 어마무지하게 씩씩한 세례명을 가진.
이 기도문은 짧지만, 실제로는 대단한 신앙 고백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발췌했음이 분명한 이 기도문의 출처는 이렇다.
가파르나움에 들어선 예수에게 한 백인대장이 자신의 하인이 아프니 그 종을 살려달라 부탁한다. 하지만 당시 유다인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이에 난색을 표하던 예수는 율법을 어길 각오를 하고 그의 집으로 향하려 한다. 그러자 그가 말한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대답했다.
"가거라, 네가 믿은대로 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 백인대장은 자신의 종이 나은 것을 알게 된다. 예수가 그 말을 한 바로 그 시각에.
말 한 마디로 병이 나으리라 확신한 그 신앙의 고백이 이 기도문에는 함축되어 있다.
남편을 잃은지 4개월만에, 박완서 선생은 스물 여섯 창창한 나이의 아들의 죽음을 맞아야 했다. 참척의 슬픔이란 어떤 것인지 사랑하는 이들을 여럿 앞서보낸 나조차 도무지 알 수 없다. 눈물로도 통곡으로도 덜해지지 않을 작가의 애통함은 그 시기에 쓰여진 이 일기들의 모음에서 절절하게 드러난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채 신을 원망하고(이 때 박완서 선생은 이미 가톨릭 신자였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인정하지 못해 몸부림치던 날들의 기록은 반드시 누군가의 죽음을 겪지 않은 사람에게도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그녀의 필치는 그 아픔 가운데서도 역시 혀를 내두를 만큼 정돈되어 있어서 더 그렇다. 아들이 죽었는데도 잠이 오고 밥이 먹히는 상황에서 다가오는 절망감.
한 말씀만 하시라는 그녀의 기도는, 그러나 백인대장의 그것처럼 신앙에 기대 있지 않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가누기 위해 찾아간 수도원, 그곳의 십자가 아래서 데굴대고 구르며 작가는 신에게 대들어 묻는다. 한 말씀만 하시라고. 왜 내게서 아들을 앗아가셨느냐고.
그러나 결국 작가의 그런 비통함과 신에 대한 증오는 화해와 평안으로 끝을 맺는다. 신과의 화해를 통해 그녀는 고백하고 만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라고.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아들이 없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부끄럽다고.
악다구니를 퍼붓던 슬픈 어머니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옅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슬픔이 옅어지면서 결국 그녀는 찾아냈던 것이다. 마음의 평화를, 절제된 슬픔을, 그리고 깊은 안식을.
한 말씀만 하시라던 그녀의 기도는 백인대장과는 다르지만 종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또 하나의 신앙 고백이 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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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동안 다들 고생 많았으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견뎌내고 또 한 해를 맞고, 또 나이를 먹게 되는구나. ... 사랑한다 친구님들 :)
가톨릭 미사 통상문 가운데 영성체 직전에 올리는 기도문의 일부다.
조금 알아듣기 쉽게 바꿔 말하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밀떡이라는 걸 신부님이 나눠주는데, 그걸 받기 직전에 올리는 기도문이다. 놀랍게도 나는 가톨릭 신자다. 그것도 '잔다르크'라는 어마무지하게 씩씩한 세례명을 가진.
이 기도문은 짧지만, 실제로는 대단한 신앙 고백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발췌했음이 분명한 이 기도문의 출처는 이렇다.
가파르나움에 들어선 예수에게 한 백인대장이 자신의 하인이 아프니 그 종을 살려달라 부탁한다. 하지만 당시 유다인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이에 난색을 표하던 예수는 율법을 어길 각오를 하고 그의 집으로 향하려 한다. 그러자 그가 말한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대답했다.
"가거라, 네가 믿은대로 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 백인대장은 자신의 종이 나은 것을 알게 된다. 예수가 그 말을 한 바로 그 시각에.
말 한 마디로 병이 나으리라 확신한 그 신앙의 고백이 이 기도문에는 함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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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잃은지 4개월만에, 박완서 선생은 스물 여섯 창창한 나이의 아들의 죽음을 맞아야 했다. 참척의 슬픔이란 어떤 것인지 사랑하는 이들을 여럿 앞서보낸 나조차 도무지 알 수 없다. 눈물로도 통곡으로도 덜해지지 않을 작가의 애통함은 그 시기에 쓰여진 이 일기들의 모음에서 절절하게 드러난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채 신을 원망하고(이 때 박완서 선생은 이미 가톨릭 신자였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인정하지 못해 몸부림치던 날들의 기록은 반드시 누군가의 죽음을 겪지 않은 사람에게도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그녀의 필치는 그 아픔 가운데서도 역시 혀를 내두를 만큼 정돈되어 있어서 더 그렇다. 아들이 죽었는데도 잠이 오고 밥이 먹히는 상황에서 다가오는 절망감.
한 말씀만 하시라는 그녀의 기도는, 그러나 백인대장의 그것처럼 신앙에 기대 있지 않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가누기 위해 찾아간 수도원, 그곳의 십자가 아래서 데굴대고 구르며 작가는 신에게 대들어 묻는다. 한 말씀만 하시라고. 왜 내게서 아들을 앗아가셨느냐고.
그러나 결국 작가의 그런 비통함과 신에 대한 증오는 화해와 평안으로 끝을 맺는다. 신과의 화해를 통해 그녀는 고백하고 만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라고.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아들이 없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부끄럽다고.
악다구니를 퍼붓던 슬픈 어머니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옅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슬픔이 옅어지면서 결국 그녀는 찾아냈던 것이다. 마음의 평화를, 절제된 슬픔을, 그리고 깊은 안식을.
한 말씀만 하시라던 그녀의 기도는 백인대장과는 다르지만 종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또 하나의 신앙 고백이 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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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동안 다들 고생 많았으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견뎌내고 또 한 해를 맞고, 또 나이를 먹게 되는구나. ... 사랑한다 친구님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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