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 좋으면 끝이야? 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 다음에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했다. 에로틱한 꿈을 꿀 적엔 여지없이 등장하는 내 방이 아닌 어느 잠자리, 그리고 꿈마다 다르지만 내 상대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근데 상대는 볼이 부어서 나를 노려보더니만 나를 밀쳐냈다. 그리고는 이불을 푸욱 덮은 채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아니 왜... 라고 어깨를 붙잡고 끌자 너만 좋으면 끝이냐고?! 라며 소리를 버럭 지른 상대는 다시 등을 돌리고 누웠다. 골이 많이 난 듯 씩씩대기까지 했다.
이건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어쨌든 상황을 보니 내가 꿈에서 기대하던 것은 모두 지나간 모양이다. 순간 힘이 빠져 한숨을 내쉬었지만 일단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웜업warm-up 도 않고 갑자기 등판한 투수마냥 순서 다 무시하고 전력투구부터 해댔다는 것일까. 아니면 몸을 과하게 풀은 탓에 정작 등판해서는 너무 일찍 퍼져버렸다는 뜻일까. 글쎄. 세상 모든 것이 결국 인내를 필요로 하듯 이것도 역시 첫째도 인내 둘째도 인내 셋째도 인내인지라 다른 땐 거들떠도 보지 않던 애국가가 이럴 땐 남자들이 부르는 마음 속 노래 1순위인데 그러고 보니 난 오늘 애국가를 부른 기억이 없네... 따위를 생각하며 난 침대에 앉아 상대의 등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고민을 하고 있었더랬다.
달래야지. 일단은 화를 풀어주어야지. 근데 만약에 세상 남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말 중 하나인 네가 뭘 잘못했는데? 가 나오면 어떻게 하지. 아니 잘못을 알아야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 것인데 애초에 뭘 잘못했는지가 꿈에 안 나왔는데 이를 어쩐다. 아니 그리고, 꿈인데 왜 그런(?) 건 하나도 없이 이렇게 시작을 할까. 사실 이런(?) 꿈은 온전히 그런(?) 걸 내 시점이 아닌 다른 시점에서 내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 마치 동영상을 보듯 혹은 내가 카메라 감독이 된 듯 뭐 그런 맛이 있어서 좋은데 정작 그런 것들은 하나도 못 느껴보고 혼만 나고 멍하니 앉아있다니 이게 뭐람. 안 그래도 남자들은 정수기 같아서 한 번 욕정을 빼주고 나면 다시 뜨거워지는 데엔 시간이 걸리... 아, 너무 멀리 갔다. 정신을 차리자. 내 눈 앞엔 나를 향해 소리를 빼액 지르고선 등을 돌리고 누워서도 씩씩대는 사람이 있지 않나. 분명 둘 중 하나일테니 분위기를 보며 적당히 맞춰보면 되겠지. 그래, 결심했어.
...까지 상황을 정리하고 난 등을 돌린 채 씩씩대는 상대의 어깨에 덮인 이불 속으로 조심스레 손을 넣어 어깨에 살짝 얹었다. 움찔, 내 손이 차가웠나보다. 얼른 어깨에서 팔뚝까지를 쓰다듬으며 등에 몸을 바짝 붙였다. 상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손으로 계속 쓰다듬으며 살짝 이불을 들어 내 몸을 집어넣어 뒤에서 안은 자세를 만들었다. 나머지 한 손을 상대의 머리 밑으로 밀어 넣자 상대는 베개을 밀어내고는 내 팔에 머리를 얹었다. 그렇게 한참을 조심스럽게 어깻죽지를 어루만지고 머리카락을 귀에 걸 듯 쓸어넘겼다 다시 푸는 것을 반복했다. 아무 말도 않고. 내 손과 몸은 조금씩 따뜻해졌고 상대의 몸도 조금씩 뜨거워졌다.
머리를 만지던 손으로 상대의 바닥에 닿은 어깨를 잡고선 몸을 돌렸다. 상대는 아무런 거부 없이 몸을 돌려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속상함이 가득 담긴 눈빛을 담은 눈 주위엔 붉은 기가 돌았고 눈물이 맺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눈 밑을 닦아주자 크흥. 코를 먹는 소리가 들리더니 입을 쭉 내밀고 입꼬리를 낮추는 표정이 보였다. 많이 서운했구나. 바닥에 눌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가다듬어주다가 눈을 마주보며 미안해, 라고 얘기했다. 상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나도 다른 말없이 계속 머리를 가다듬고 이마께를 어루만졌다. 한참을 어루만지던 이마에 입을 맞추곤 미안해, 라고 말했다. 이마에서 코를 타고 볼을 지나 입술 근처까지 천천히 입을 맞추며 그 때마다 미안해, 라고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입술에 입을 맞춘 뒤, 거리를 벌려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미안해, 라고 말을 하고선 상대를 꼭 안아주었다.
품에 안긴 상대는 많이 속상했던 모양인지 한참을 울먹였다. 난 아무 말 없이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후- 상대의 뜨거운 한숨이 가슴팍을 스쳐지나갔고, 상대는 조금은 풀린 얼굴로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며 얘기했다. 또 그러지 마? 난 알았다고 얘기하고선 가슴 깊이 상대를 그러안았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비밀이다. 뭐를 잘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잘 해결되었다면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이니까. 또 모처럼 꿈속에 내 방이 아닌 잠자리가 등장한 이유를 충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
둘 다 몸은 충분히 데워져있었고 상대는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좋아, 다시 시작이다. 다만 아까와 같은 불상사가 생기면 곤란하니, 아까 생각했던 두 가지 문제 중 첫 번째 문제였던 웜업 부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이번엔 천천히 시작하기로 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종아리부터 허벅지 뒤쪽과 엉덩이를 거쳐 등을 타고 위로 올라간 뒤 다시 어깨에서 가슴, 허리를 지나 허벅지 안쪽까지. 따뜻하던 상대의 몸이 뜨거워지고 숨결이 조금씩 거세지는 것을 느끼며 난 다시 상대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 순간. 상대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이제 시작해도 돼?
응. 응? 응. 조건반사처럼 나온 첫 대답과 의문을 담은 두 번째 대답, 그리고 뭐든 좋다는 마지막 대답이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상대는 배시시 웃더니 몸을 돌려 내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시작된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은 발가락을 꼬옥 오므릴 정도로 큰 파도를 몰고 왔다. 상대가 가져다주는 파도의 흐름에 몸을 맡기려는 찰나, 아까의 사건은 두 번째 문제 즉 너무 빠른 퍼짐이 원인이라 직감하고선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애국가를 열심히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는 집요했다. 몸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몰고 온 파도를 팔 끝까지 능수능란하게 이끌었다. 그리고는 뭔가를 꺼냈다. 빨간 끈이었다. 침대에 손을 단단히 묶고는 다시 다른 손으로 파도를 이끌어가 나머지 손도 침대에 묶어버렸다. 내가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것을 알아챈 상대는 배시시 웃으며 내게 살짝 입 맞추고는 다시금 뜨거운 파도를 불러일으켰다. 격정적인 파도가 다리 끝으로 가자 상대는 양 다리마저 침대에 묶어버렸다.
아, 이런 취향이었던 것인가. 이게 결박 플레이라는 것인가. 오묘함과 낯설음이 가져다주는 흥분은 가벼운 모험심과도 비슷한 무언가를 가지고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고 있었다. 상대는 거침없이 내 몸 위로 올라와서 날 아래로 내려다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양손을 들어 머리를 살짝 정리하더니 내 위로 몸을 눕힌 상대는 내 귀에 뜨겁게 속삭였다. 약속했지? 또 그러면 죽일 거야. 안 그래도 묶이기까지 몰고 온 파도가 이렇게나 크고 뜨거웠는데, 이런 상황에선 본게임에 들어가도 페이스 조절을 할 수가 없을텐데, 대체 애국가를 얼마나 빡시... 아니 열심히 불러야 하나. 등등을 고민하고 있던 찰나 들려온 상대의 말은 무섭기는커녕 귀여울 뿐이었다. 그래, 모든 것을 잊고 애국가에 집중해주마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런 나와 입을 맞춘 상대는 다시 몸을 일으키며 침대 옆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더니 내 옆에 놓았다. 그리고는 나와 몸을 합쳤다. 교성을 내뿜으며 허리를 잔뜩 휘던 상대는 곧 내 옆에 놓았던 물체를 양손에 그러쥐었다. 짧은 아이스픽이었다. 상대의 목소리가 커지고 내 표정이 힘들어질수록 상대의 양손은 조금씩 위로 올라가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 손의 높이가 올라갈수록 공포심은 약간씩 쌓여갔지만 상대의 몸놀림에 따른 자극은 너무나 크게 쌓여갔고 난 도저히 버티지 못할 지경까지 다다랐다.
그만. 잠깐만. 하지만 상대는 내 말에 잠시 몸놀림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몸놀림을 이어나갔다. 그만, 그만, 이대로는 너무 빨라. 라고 말을 이어가자 그녀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살풋 웃었다. 아, 전해졌구나. 마라톤을 백미터 달리기처럼 뛰면 당연히 얼마 못 가니 페이스 조절을 하며 달려야지라는 우스갯소리를 주워섬기자니 상대는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다가 다시 몸을 내 위로 눕히며 귀에 속삭였다. 나, 더 좋은 방법을 알아. 이러면 오래 가더라고. 음? 뭐지? 라고 생각하던 찰나 상대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몸을 일으키던 반동으로 내 몸 위에 엎드리며 양손에 그러쥔 아이스픽을 내리 꽂았다. 아이스픽은 바로 내 귀 위에 꽂혔다. 손잡이가 머리카락에 닿을 정도였다. 우왁, 순간적으로 상욕이 나왔다.
다시 몸을 일으킨 상대는 겁에 질린 내 얼굴을 보며 무척이나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놀리기 시작했다. 상대의 몸놀림에 맞춰 아이스픽이 교묘한 리듬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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