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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01505 / 기억상실] 누가 알까. by 란테곰

 

어릴 적 우리 집 뒤엔 사람들이 뚝방이라 부르는 큰 제방이 있었다. 어린 나이의 내겐 거의 언덕과 다름이 없는 수준의 높이인 제방을 억지로 올라가면 바로 눈앞에 큰 강이 보였다. 그 강이 탄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이미 그 동네를 벗어난 뒤 십여 년이 지나서였다. 그 제방을 올라 강가로 나아가는 길에 난 아무도 몰래 보물 상자를 묻어두었다. 그 안엔 딱지며 구슬이며 좀 노는 중학생 형이 구해 준 야한 사진이며 기타 등등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가끔씩 제방을 오르락내리락하다 삐라를 줍기도 했는데, 그 삐라들도 모아서 학교 앞 파출소에 주고선 연필이나 공책을 받아오기도 했었다. , 나이 견적 나온다.

 

그 보물 상자는 사실 내 비상금과도 같은 존재였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구슬은 거의 화폐 취급을 받았던 때였다. 하루 용돈이 백 원에 불과했던 나로서는 그것이 유일한 재테크 수단이자 입출금 내역이 남지 않는 자유입출금 통장과도 같았다. 동네 애들에게 따먹은 구슬을 학교서 팔아 그렇게나 갖고 싶던 샤프연필을 사기도 했고, 오락실에 가서 스파2를 하다가 계속 이기자 상대가 얌실이 쓴다고 휘두른 의자에 맞기도 했다. 당시 난 마을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는데, 당시 차비였던 육십 원을 아꼈다가 재테크에 투자하고 돌아오는 길은 친구와 함께 30분 거리를 걸어오기 일쑤였다. 한 번은 그렇게 친구와 함께 걸어오다 외진 길에서 깡패 형을 만나 재테크를 위해 피같이 모은 오백 원을 뺏기고 엉엉 울며 오기도 했었다.

 

그렇게 모은 재테크 박... 아니 보물 상자가 털리는 사건이 생겼다. 바로 홍수 때문이었다. 비바람과 물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옷장 위에 억지로 끼어놓은 텔레비전부터 40권짜리 소년소녀 명작 동화 전집은 물론이요 수저와 그릇까지.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자 온 동네 사람들이 허탈한 가운데에서도 극복해내기 위해 집안 구석구석의 모든 가재도구를 꺼내 씻고 말리는 상황이었지만, 난 내 보물 상자가 빗물에 휩쓸려간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보물 상자가 있던 자리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것은 꼴랑 종이배 하나였다. 흙탕물에 찌들었다 볕에 말라 버석버석 소리가 나던 그 배를 주워들고 강가에 띄웠다. 배는 좀 버티는 모양새였지만 금세 물을 먹고 곧 강바닥으로 사라졌다.

 


오학년이 되며 난 탄천 옆에서 경안천 옆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내 또래 친구들의 놀이도구에 더 이상 구슬이나 딱지가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오락기나 축구공, 컴퓨터와 친해지는 사이 난 이성에 눈을 떴고, 펜팔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과 이런 저런 경험 http://eseses.tistory.com/81 을 쌓는 사이 난 보물 상자에 대한 기억 자체를 잊어버리고야 말았다